하얗고 검은 어둠 속에서

피아니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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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곡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피아니스트는 얼마나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하는가

     

    엘비스 코스텔로는 음악에 관한 글을 쓰는 일이 건축에 관한 춤을 추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산문을 통해 시의 매력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언어로는, 특히 산문으로는 선율과 시간이 섞이면서 발생하는 음악의 매력을 재현할 수 없다. 흔해빠진 해설을 피하고 그 음악의 핵심에 다다르고자 노력하는 전문 작가들마저도, 그 핵심에 관해서는 오직 비유나 묘사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음악에 관한 글을 계속 쓴다. 마치 사랑에 관한 글을 끝없이 써 오고 있는 것과 같다. 완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보여 주고 싶은 대상의 작은 측면만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아주 작은 성공을 거두었을 때조차 결국에는 '음악을 글로 전달하는 데' 실패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음악에 관한 글을 쓰고 또 쓴다. 여기에 작은 역설이 있다. 이렇게 명백한 실패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글들이 음악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조너선 비스가 피아노 음악에 대해 쓴 이야기를 보면 이 역설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음악을 익힌다는 일 역시 이 역설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확신을 가지려고 끝없이 노력해야 하지만,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는 사실. 거꾸로 말하자면 확신을 얻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피아니스트들을 구도자라 부른다. 피아니스트가 음악을 '이해'하고 자신의 손가락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일은 다다를 수 없는 완전을 향한 영원한 노정 위에 있으며,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은 끝내 완전해질 수 없는 한 인간이 완전을 향해 팔을 뻗는 순간 속에 함께 머무르는 것이다. 결국 피아노 독주를 들을 때,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보게 된다. 너무 깊거나 넓은 우주와 그 안에 서 있는 한 인간이다. 음악이 흐르면서 그 두 개의 시점 사이에서, 세상과 한 인간 사이에서, 음악과 피아니스트 사이에서, 피아니스트와 관객들 사이에서 시간이 흘러간다. 우리는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조너선 비스의 <하얗고 검은 어둠 속에서>는 바로 이런 '음악과 삶'의 관계를 느끼게 해 주는 진귀한 책이다. 유명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이자 출판사를 끼지 않고 자신의 글을 출간한 에세이스트인 비스는 음악 지식과 시적인 문장과 고독한 영혼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그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나 슈만의 <새벽의 노래>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이 어떤 매력을 지니고 있는지 표현하기 위해 '음악에 관한 글'이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한다. 우선 그는 곡의 구조를 분석하고, 악보 속에 담긴 문학적인 메시지를 알려 주면서 명곡이 가진 매력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은 비스 자신의 지난 날들과 이어진다. 그는 직업 피아니스트로서 얼마나 열렬히 음악을 파고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열성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인지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과 삶의 문제를 연관시킨다.

    이 지점에서 <하얗고 검은 어둠 속에서>는 독보적인 음악 에세이가 된다. 비스에 따르면 피아니스트는 특히 정신 건강을 위협하는 직업이다. 너무 위대한 음악들을 혼자서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악절을 두고도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 명곡의 세계는 거의 미로와 같으며, 피아니스트는 홀로 그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 걸맞는 소리를 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에 실패의 가능성이 드리워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의심하는 인간은 피아니스트로 살아가려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러나 비스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은 피아니스트가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다. 의심할 줄 아는 피아니스트는 확신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음악 속에서 더 많은 것을 살피고 발견하며(아르투르 슈나벨의 예가 나온다), 자신의 손가락을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단련시키고(루돌프 제르킨의 예가 나온다), 자신이 활동하는 동안은 음악을 사랑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심과 고통이 그를 더 멀리까지 나아가도록 만든다. 특히 마지막 특성, 즉 사랑에 관한 역설은 아이러니에 기반을 둔 비극 문학이 오래도록 사랑했던 주제다. 남들보다 고통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그 무언가를(예컨대 피아노를, 혹은 삶 자체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그 대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비스 역시 섬세하고 내향적인 자신이 피아니스트로 살아가기 힘들 때가 있다고 고백하지만, 그런 대가를 순순히 치르는 이유를 밝힘으로써 피아니스트의 '' 한가운데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 준다. 그것은 순전한 사랑이다. 음악이 그에게 외로움과 고통과 불안을 안겨 주더라도 그는 음악을 포기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세계의 언저리를 방황하는 일만큼 사랑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얗고 검은 어둠 속에서>는 조너선 비스가 몇 년에 걸쳐 전자책으로 각각 출간한 세 편의 글을 모은 책으로, 종이책으로는 세계 최초로 출간되었다. 시간순으로 배열한 세 편의 글을 읽다 보면 그의 내면이 조금씩 더 무르익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비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곡을 설명할 때는 전문성과 감수성을 모두 갖춘 해설자이지만(특히 현역 연주자 중에서는 독보적이다), 이렇게 사려깊은 글을 쓰게 되기까지 자신을 이끌어 온 숙명에 대해 얘기할 때는 점점 더 겸손하고 담담해진다. 다다를 수 없는 경지를 사랑하고 그곳을 향해 조용히 다가가는 사람이 가진 기품이 그의 이야기 안에 맴돈다.

    피아노 음악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특히 베토벤과 슈만을 이해하는 소중한 힌트를 제공한다. 또한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피아니스트의 작업 과정, 즉 한 곡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고뇌하는 순간들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하나의 질문이 있다. 답이 주어지지 않고 독자들에게 남겨진 그 질문은 사랑에 관한 것이다. 이 수수께끼가 독자들의 마음 속에 머무는 동안, <하얗고 검은 어둠>은 한 피아니스트의 삶을 넘어서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이라는 숙제를 밝힌다. 만약 좋은 에세이가 '작은 삶의 조각만으로 잠시나마 세상 전체를 보여 주는' 이야기라면, 이 책도 거기에 속한다. 그렇게, 음악과 삶을 동시에 좋아하거나 궁금해하는 독자들에게 <하얗고 검은 어둠>은 잊지 못할 책으로 남겨질 것이다.

     

     

    **책 속에서

    평정심은 예술가에게(혹은 개인에게) 소중한 자산이지만, 얻기 어려울 뿐 아니라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 연주자는 그 직업적 특성상 다른 사람의 발상에 맞춰 미묘하고도 이례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굽히고 일그러뜨려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게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자주 있다. 그런데도 나는 왜 하필 광선처럼 날카로운 집중력과 전적인 자유분방함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베토벤의 음악에 뛰어든 것일까? 달리 말해 나는 왜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광기를 향해 몰아갔을까?

    (...)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매혹이 복잡한 감정을 거치지 않고는 일어나지 않으며, 대체로 위험의 요소를 동반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자기를 잃어버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바로 자기를 잃는 길이기 때문에 타인과, 아이디어와, 예술 작품과 사랑에 빠진다.

    -11~12

     

    원래 연주자가 되려면 자신감 이상의 그 무엇이, 일종의 확신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해석으로 청중을 주목을 휘어잡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의심'보다 더 강력한 자질, 청중의 마음을 더 크게 흔드는 자질은 없다(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연주자가 해답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제기하는 질문을 들을 수 있어서 그에게 끌린다). 베토벤을 연주할 때, 제르킨은 자신의 내면이 들은 소리를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통제력을 손에 넣고자 끈질기게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연주가 전하는 특징은 그 노력을 통해 통제된 무엇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을 향하는 시선, 즉 경외심이다. 경외심에 차 바라보는 음악의 경이로움이다. 이 경이로움이 그의 연주를 잊을 수 없게 만든다.

    -45

     

    지금 나는 극단적으로 내밀한, 사적인 단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대화의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 모두에게 말하는 것이 있고, 몇몇 사람에게만 말하는 것이나, 사랑하는 사람(그리고 어쩌면 정신 치료사)에게만 말하는 것, 혹은 스스로에게만 말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스스로에게조차 털어놓지 않는 것이 있다. 슈만의 음악은 바로 그런 수준에서 작동한다. 그는 곡을 쓸 때마다 자신의 깊은 곳으로 손을 뻗어 가장 모호하게 숨겨져 있는 것을 찾아내려 하며, 그것을 모든 사람의 모호함처럼 느껴지도록 만든다.이것은 소중하고 희귀한 특징이다. 동시에 지독히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유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건강한 행위다. 하지만 그것을 반복적으로 응시하는 것은, 자신의 유약함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고 형광등 불빛에 비추어보는 일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슈만은 바로 그런 일을 한다.

    -105~106

     

    나는 <여인의 사랑과 생애>를 들을 때 내가 듣는 것이 슈만 자신의 소멸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의 다른 음악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의 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슈만의 뒤를 따라 무서운 복도를 걷는 것이다. 그 경험이 좋든 싫든 나는 결코 이를 주저하지 않았다. 슈만을 연주할 때면 그 곡의 정서적 의미에 밀착되는 기분이 들면서 온몸의 화학적 성질이 바뀐다. 음악을 통해 이 기묘하고도 아름다우며 망가진 사람을 제대로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어떤 위험이 따르더라도 알고 싶다. 이런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107~108

     

    음악은 맨 처음 생겨날 때부터 일종의 언어와 같았다. 항상 문법과 억양과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음악이 일기가 된 것은 슈만에 와서 일어난 일이다. 그에 이르러 음악이 이전보다 훨씬 풍부해졌다거나 의미를 더 많이 부여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낫다. 슈만은 음악을 구원이자 생명줄로 삼은 첫 번째 작곡가라고. 그에게는 오직 음악만이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의 형식이어서, 즉 자신의 유일한 목소리여서 음악을 작곡했다. <크라이슬레리아나>에 담긴 열정, 시정, 공포는 그의 삶에 부록처럼 주어진 요소들이 아니었다. 음악은 그의 삶의 경험 자체였다.

    -146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인식한다. 역설적이게도 외로움은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러나 음악가들은 매일의 삶과 작업 속에서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외로움의 경험은 우리의 연주에서 드러나고, 많은 경우, 우리가 왜 연주하는지를 말해준다. 감히 말하건대, 피아니스트들은 다른 어떤 음악가보다도 이런 현실을 더 많이 떠안고 살아간다. 그토록 많은 위대한 음악들을 혼자서 연주하느라 정신건강을 위협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자신의 머리와 가슴 안에서 보내는 음악가들은 오로지 피아니스트밖에 없다. 그토록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슈만에게 단순한 이해와 애정을 넘어 각별한 애착을 느끼는 이유는 슈만의 피아노곡의 탁월함이 아니라바로 이러한 고립감 때문일 것이다. 완전히 외로운 우리의 일부. 이것이 슈만이 음악적 일기를 작곡하면서 고심했던 부분이다. 그는 외로움을 다룰 때는 얼버무리거나 포장을 하지 않는다. 그의 내밀함Innigkeit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상하고 아름다운 선물이다.

    -148~149

     

    그 얼마 전에 나는 C장조로 마무리한 피아노 소나타<발트슈타인>를 접한 바 있었다. 거기서 베토벤은 마지막에 장장 스물아홉 개의 C장조 화 음을 울려댔다. 5번 교향곡의 경우처럼 작품의 궤적이 어둠에서 빛으로 향할 때는 이런 경향이 터무니없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쨌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장대한 해결이 일어나리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건반을 자유롭게 가로지른 곡은 개시부에 나왔던 성가풍의 선율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음악이 마지막으로 혼을 불태운 다음, 어쩔 수 없이 최종 종지로 접어드는 것을 들었다. 희미한 C장조 박동이 한 번, 다시 한 번, 또다시 한 번 들렸다. 나는 네 번째를 기다렸다.

    들려오지 않았다.

    C장조 화음은 세 번째가 마지막이었다. 요란한 팡파르도, 확장도, 끝났다는 느낌을 주는 그 어떤 제스처도 없었다. 그냥 끝이었다. 이 소나타는 결말을 맺는 대신 공허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지만, 멈췄던 숨을 크게 내뱉을 수는 있었다.

    나는 죽음을 들었던 것이다.

    -174

     


    도서명 하얗고 검은 어둠 속에서
    저자 조너선 비스
    출판사 풍월당
    크기 122*186mm
    쪽수 240p
    제품구성 낱권
    출간일 2021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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