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쓴 바흐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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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사 풍월당
원산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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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바흐 연구사에 새 장을 연 권위 있는 고전

    1908년 출간된 슈바이처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오늘날까지도 바흐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기본 연구서이자 안내서다. 출간 후 백 년을 훌쩍 넘겼음에도 독일에서 여전히 중쇄를 찍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이 음악가들과 애호가들 사이에서 얼마나 널리 읽히고 있는지를 방증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타르에서는 바흐를 공부할 때 필수적으로 읽어야 하는 책으로 이 슈바이처의 저작이 언급되기도 한다. 그만큼 전세계의 음악가들 사이에서 굳건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니콜라우스 포르켈이 남긴 최초의 바흐 전기(1802), 필리프 슈피타의 방대한 바흐 전기(1873~1880)의 뒤를 잇는 이 역작은 음악가 슈바이처의 최대 업적 가운데 하나다.

    슈바이처가 이 책을 출간할 때만 해도 바흐의 음악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멘델스존과 슈피타 등의 선구적인 노력이 있었음에도 바흐는 소수 음악가들만 아는 진귀한음악에 가까웠다. 그러나 구 바흐 협회가 반세기 노력을 기울여 1899, 46권 분량의 바흐 전집을 완간하면서 잊혔던 바흐의 세계가 빛을 보게 되었다. 구 바흐 협회는 임무를 완수한 뒤 해산하였고, 이후에는 바흐의 음악을 일반에 알리자는 목표로 신 바흐 협회가 창설되었다. 슈바이처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바흐 페스티벌이 열리는 등 그의 음악이 일반에 서서히 알려지면서 여러 가지 질문이 제기되던 바로 그때, 그야말로 적기에출간되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슈바이처 박사의 의료 봉사를 가능하게 한 책

    많은 사람들은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서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에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다간 의사요, 1952년 노벨 평화상의 수상자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칸트 철학과 성만찬 연구로 명성을 얻은 철학 및 신학박사였고, 바흐 오르간 연주로 명성을 얻은 탁월한 오르가니스트였다. 슈바이처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출간 직후부터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유지하며 그에게 명성과 물질적 보상, 그 외 강연이나 연주 등의 기회를 안겨주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슈바이처의 봉사의 삶은 많은 부분 이 책을 비롯한 그의 음악 활동으로 인해 가능했다. 말하자면 음악이 서아프리카의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린것이다.

    예수와 칸트와 바흐는 슈바이처의 세 스승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배움 너머의 실천을 강조했던 사람들이었기에 슈바이처 또한 그렇게 살았고 아프리카에서의 의료 봉사는 그 필생의 귀결이라 볼 수 있다. 음악으로 생명을 살린다.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의 힘을 나타내는 말이다. 슈바이처는 매일의 빵과 같은 바흐의 음악을 통해 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일깨웠다.

     

    고음악의 선구자, 유럽의 오르간을 구하다

    슈바이처는 음악가로서도 실천적이었다. 의술로 아프리카인들을 구했던 그는 음악에 관한 지식으로는 유럽의 늙은 오르간들을 구했다. 단순히 연주하기 편리하고 음량을 크게 하려고 악기를 현대적으로개량하는 관행에 슈바이처는 제동을 걸었고, 실버만 오르간이나 발커 오르간 등 옛 시대의 귀중한 오르간을 그대로 보존하는 이른바 오르간 수호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 책에는 바흐 시대의 방식으로 정음된 옛 오르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와 바흐 음악의 성격을 잘 살려내는 연주법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오늘날에는 이른바 원전 연주 붐이 일어나 시대악기로 르네상스 및 바로크 시대의 작품을 연주하는 일이 거의 보편화되었지만, 슈바이처 생전에는 후기 낭만주의풍의 대형 오케스트라로 바흐 음악을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이 책에서 바흐의 음악은 베토벤 이후의 음악과는 전혀 다른 뿌리에서 출발했다고 강조하며 상대적으로 작은 편성의 역사주의적 연주를 옹호하는 입장에 선다. 20세기 초라는 이 책의 출간 시점을 고려할 때 매우 선구적인 시각이다. 영국의 지휘자 존 버트John Butt의 말대로 슈바이처의 언어는 오늘날의 고음악 연주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 외에도 이 책에는 바흐 시대의 운지법과 강약법 연주 및 예배의 관행 등 연주자들을 위한 실제적인 조언들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바흐를 다룬 전기적 저서들 가운데 이 책만큼 연주의 실제를 포괄적이고도 깊게 다룬 책은 아직까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코랄과 칸타타. 바흐 음악의 신비를 여는 열쇠

    슈바이처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스승 샤를마리 비도르의 질문 때문이었다. 왜 그토록 논리정연하던 바흐의 코랄 프렐류드에 갑자기 그와 무관한 엉뚱한 음형들이 등장하는가. 악보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그 숙제에 대해 슈바이처는 바흐의 코랄 가사에 그 답이 있다고 말했다. 코랄 가사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지배적인 감정을 일종의 음 상징으로 만들어 표현했다는 것이다. 바흐 음악에 대한 새로운 혜안을 열어주는 제자의 대답에 고무된 비도르는 그를 격려하여 바흐 음악에 나타나는 음악과 코랄의 관계에 대해 책을 쓰게 했다.

    슈바이처는 발걸음, 뜀박질, 추락과 가라앉음과 같은 움직임, 파도, , 날개, 바람 등과 같은 동적인 심상, 기쁨, 슬픔과 같은 감정이나 그와 관련된 웃음, 한숨, 신음, 흐느낌 같은 동작들을 음악적 모티프로 만들어 칸타타와 수난곡, 코랄 프렐류드 등에 일관성 있게 활용했다. 그러므로 바흐를 연주하는 음악가들에게 코랄 텍스트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다. 또 코랄의 가사를 모티프화하는 바흐만의 방식을 이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슈바이처는 이전까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바흐 음악과 가사의 관련성을 처음으로 강조함으로서 음악가 바흐에 대한 상을 제대로 정립시켰다. 그는 그저 연주의 달인이나 주어진 주제를 장인처럼 다루는 음악 기술자가 아니라 시의 이념과 심상을 음악으로 옮겨낼 줄 아는 시인 음악가이자 음악의 화가였던 것이다.

     

    음악 애호가의 바흐 사랑에 불을 지필 책

    연주를 위한 실천적 팁이 많이 들어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도 이 책은 매력적이다. 단순한 전기적 사실을 뛰어넘는 인간 바흐에 대한 통찰 특히 그를 형성한 신앙, 세계관, 직업윤리 등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 은 악보를 읽을 수 없는 독자들에게도 깊은 감화를 줄 것이다. 우리말 번역 기준으로 거의 1,400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이지만, 슈바이처의 서술은 딱딱하지 않다. 때로는 비판적으로, 때로는 냉철하게 주제를 이끌어가면서도 가족과 일상사, 희로애락의 곡절 등 바흐의 삶 안쪽을 들여다볼 때는 더 없이 애정 어린 온기가 녹아 있다. 바흐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장면들을 포착할 때는 슈바이처는 마치 시인으로 변하여 아름다운 언어로 가버린 망각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낸다. 이처럼 바흐에 대한 슈바이처의 사랑은 어쩌면 이 저작을 이끌어가는 근원적인 힘이었으리라. 우리말 역자 강해근 또한 그에 준하는 사랑으로 언어를 만지고 벼렸다. 그 결과 인간 바흐와 예술가 바흐는 백여년 시간을 넘어 오늘 우리 독자에게 더없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우리말 번역, 값진 성과.

    슈바이처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이미 여러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영어권에서는 어니스트 뉴먼의 뛰어난 번역(1911)이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고, 체코와 폴란드의 경우는 국가 주도의 번역 지원 사업을 통해 독일어판의 자국어 번역을 완수했다. 한편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는 독일어 평전 대신 이 저서의 절반 정도 분량인 프랑스어 버전인 J. S. 바흐. 음악가 시인(1905)을 번역했다. 그밖에 일본어, 중국어, 핀란드어, 덴마크어, 네덜란드어, 히브리어 등으로도 번역되었다. 풍월당에서 펴내는 이번 번역을 통해 우리도 이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우리 음악가들이 국제적으로 성과를 내고 있는 오늘날(한국 클래식 연주자들의 약진을 일각에서는 소위 ‘K-클래식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양 음악의 뿌리요,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바흐 음악의 핵심에 우리의 독자들, 우리의 음악가들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좁게는 국내 음악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고, 넓게는 우리의 클래식 감상 저변에, 서양 문화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기여할 책이다.

    역자 강해근은 나진규, 장견실 등과 함께 20여년의 노고를 기울여 이 역작을 번역했다. 이번 우리말 번역은 서양음악에 대한 내실, 곧 보다 깊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우리 음악계와 계속 성장해온 우리 고음악계를 생각할 때 우리의 경우에도 적기에 출간된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구성

    이 저작은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바흐를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관점을 명시한다. 슈바이처는 바흐를 우선 객관적인 음악가로 규정한다. 바흐는 자신을 표현하는 대신 자기 시대의 과업을 정리하고 발현시키는 예술가로서 이전 시대를 집대성하는 하나의 끝이었다는 것이다. 모든 시대의 발전상과 과제를 자기 안에서 구현한 그를 슈바이처는 단독적 개성이 아닌 보편적 개성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바흐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바흐 이전까지의 발전사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어지는 2~6장까지는 바흐 이전의 코랄, 코랄전주곡, 수난곡과 칸타타 등의 발전사를 약술한다. 바흐의 음악이 존재하게 된 토대로서 슈바이처는 코랄의 가사(문학적 측면)을 음악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룬다. 이후 드디어 바흐가 등장한다. 슈바이처는 7~8장에서 먼저 연대기적으로 바흐의 인생사를 약술한다. 여기에는 바흐와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들이 간략하게나마 빠짐없이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바흐의 전기적 서술에서 더욱 값진 것은 9~12장에 이르는 주제별 내용들이다. 이 부분에는 마치 인간 바흐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문학적 필치로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수백년 전에 살았던 한 인물의 성격과 됨됨이, 세계관과 개성이 그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과 더불어 선명하게 묘사되어 음악인과 일반인 모두를 매료할 만하다. 특히 12장에서는 슈바이처 당대까지의 바흐 수용사를 다루고 있어 바흐에 관한 저평가와 몰이해, 오해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12장까지의 내용이 주로 음악사적 서술이라면 13~35장까지는 바흐 음악의 작품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론은 다시 첫 부분과 둘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첫 부분은 13~18장이다. 여기에서는 각각 오르간, 클라비어, 오케스트라와 실내악, 최후기의 걸작들을 다루되, 작품 자체만이 아니라 연주의 실제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작품론 둘째 부분인 19~35장에서는 바흐 음악의 핵심인 코랄, 칸타타, 수난곡 등을 다룬다.

    슈바이처는 이를 위해 바로 작품 분석으로 들어가지 않고 19~21장에 이르는 세 개의 장에서 특별한 미학적 논의를 펼친다. 이 저작의 핵심적 주장이 담겨 있는 이 부분에서 슈바이처는 바흐 음악의 회화적 면모, 표현적 면모를 강조한다. 곧 바흐는 감정을 묘사하는 바그너 등의 문학적작곡가와 달리 떠오르는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그려내려는 화가유형의 작곡가였으며, 코랄 가사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회화적 상상력을 발휘해 다양한 모티브를 만들어냈다. 자연히 코랄 및 칸타타와 직접 연관되는 이러한 모티브의 의미를 알면 바흐 음악을 더 깊이 있게 누릴 수 있게 된다. 이후 슈바이처는 22~23장에서 코랄과 칸타타의 음악언어를 정리한 후, 24~35장까지 연대기순으로 칸타타, 수난곡, 미사곡 등의 성악 음악 전반을 해설한다. 특히 35장은 바흐 연주에 관한 실제적인 지침을 상세하게 다룬다.

     

     

    목차

    저자의 말 7

    머리말 10

    I. 바흐 예술의 뿌리 25

    II. 코랄 가사의 성립 33

    III. 코랄 선율의 성립 49

    IV. 예배에서의 코랄 65

    V. 바흐까지의 코랄전주곡 87

    VI. 바흐까지의 칸타타와 수난곡 103

    VII. 아이제나흐에서 라이프치히까지 165

    VIII. 라이프치히의 바흐 189

    IX. 모습, 기질, 성격 241

    X. 음악 여행, 비평가, 친구 271

    XI. 예술가 바흐와 선생으로서의 바흐 297

    XII. 죽음과 부활 347

    XIII. 오르간 작품 409

    XIV. 오르간 작품의 연주 449

    XV. 클라비어 작품 485

    XVI. 클라비어 작품의 연주 523

    XVII. 실내악 작품과 오케스트라 작품 575

    XVIII. 음악의 헌정푸가의 기법623

    XIX. 바흐와 미학 641

    XX. 시적 음악과 회화적 음악 653

    XXI. 바흐 음악에서 가사와 음 681

    XXII. 코랄의 음악언어 725

    XXIII. 칸타타의 음악언어 753

    XXIV. 아른슈타트, 뮐하우젠, 바이마르와 811

    XXV. 1723~1724년 라이프치히의 칸타타 849

    XXVI. 마니피카트요한수난곡875

    XXVII. 1725~1727년의 칸타타 905

    XXVIII. 애도송마태수난곡929

    XXIX. 1728~1734년의 칸타타 969

    XXX. 세속칸타타 1007

    XXXI. 모테트와 노래 1059

    XXXII. 오라토리오 1073

    XXXIII. 미사곡 1089

    XXXIV. 1734년 이후의 칸타타 1115

    XXXV. 칸타타와 수난곡의 연주 1181

    참고문헌 1297

    칸타타와 코랄 목록 1300

    옮긴이의 말 1323

    인명 찾아보기 1328

     

    책 속에서

     

    10~11

    1899년 어느 날, 둘이서 바흐의 코랄전주곡을 공부하던 중에 나는 그에게 이 음악은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고 고백하였다. “프렐류드와 푸가에서는 이 대가의 논리가 그렇게도 명료하고 정연한데, 코랄 선율만 나오면 그만 모든 게 모호해진다고 털어놓았다. [...]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라며 나의 제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코랄은 그 가사로 풀지 않으면 해명되지 않는 게 많거든요.”

    나는 가장 골칫거리였던 코랄전주곡들을 제자 앞에 펼쳐 놓았다. 그는 그 곡들의 가사를 프랑스어로 외워 낭송해 주었다. 그러자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다음 날부터 며칠 동안 우리는 오후 내내 코랄전주곡 전곡을 살펴보았다. 슈바이처는그가 바로 내 제자다한 곡씩 설명하고, 그 설명을 들으며 나는바흐의 존재에 관해서는 겨우 어렴풋이 상상만 하고 있었는데한 사람의 새로운 바흐를 알게 되었다. 나는 단번에 깨달았다. 바흐는 내가 거대 입상처럼 우러러보았던 위대한 대위법의 대가 그 이상으로, 이 토마스칸토르의 예술에는 시의 이념을 표현하고 가사와 음을 일치시키려는 그의 욕망과 능력이 드러나 있음을 본 것이다.

     

    27~28

    예술가에는 주관적 예술가와 객관적 예술가가 있다. 주관적 예술가의 예술적 기반은 그들 자신의 개성이다. 그들은 그들이 속한 시대에 예속되지 않고 거의 자유롭게 창작하며, 그들 스스로 법이 되어 시대의 흐름에 맞서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표현한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그러했다.

    바흐는 객관적 예술가다. 객관적 예술가들은 전적으로 자신들이 사는 시대에 속해 있으며, 오로지 그 시대가 제공하는 형식과 사상만으로 작품을 만든다. [...] 이 객관적 예술가의 작품은 비개성적이 아니라 초개성적이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유일무이한 완벽함으로 다시 한번 그리고 최종적으로 표현하고픈 열망만 가진 듯이 보인다. 이렇듯 그의 내부에는 그가 아니라 그 시대의 정신이 살고 있으며, 지난 세대와 현세대의 모든 예술상의 모색과 욕망, 창작과 동경, 그리고 방황이 그 안에서 한데 어우러져 힘을 발한다.

     

    73

    루터가 가장 좋아한 작곡가는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궁정악장 조스캥 데프레(1450~1521), 그리고 하인리히 이자크의 제자로 빈과 뮌헨 궁정에서 활동한 루트비히 젠플(1555년경 사망)이었다. 조스캥에 대한 루터의 발언은 유명하다. “그는 음표의 대가다. 음표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고, 다른 작곡가는 음표가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98~99

    어느 분야든 어떤 것의 발전 원인을 캐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지식에는 그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더 뚜렷이 인식하게 된다. 이 한계는 특히 포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보이는 순간에, 더 높고 최종적인 지식에 도달하기 위해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더욱 강고해 보인다. 자연과학과 철학과 종교의 발전사, 아니 인문학 자체의 역사는 바로 이 불가해한 정지停止의 역사이고, 어느 특정 시대에는 모든 여건이 최적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도달이 허용되지 않은 지식의 역사이며,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 자체가 어떤 신비로운 명령에 의해 금지되었던 생각들의 역사다. 이처럼 예술의 실제 역사는 보이지도 않고 넘어설 수도 없으며, 때가 왔을 때에야 허물어지는 경계의 역사다.

     

    109~110

    해당 주일 복음에 따른 독일어 설교가 태양이라면, 그 옆에서 독일어 성가가 음악적 설교로서 햇무리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이 빛의 영역 밖의 음악들은 모두 그늘에 가린다. 음악가들은 가사가 고정된 미사곡을 거듭 작곡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과제가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이제는 그들에게 매년 네 복음서를 바탕으로 한 새 창작시에 음악을 붙이는 임무가 부과된 것이다. 그들은 이 자유로운 교회음악에 매료되어 예배의 한 부분인 규정된 음악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끔찍하게 비음악적인 니케아 신앙고백을 지겨워하며 거듭 음으로 옮기기보다는 새로운 모테트 가사를 작곡하는 일에 더 끌렸고, 완결된 미사곡 하나를 작곡하기보다 오히려 1년분의 설교음악 작곡을 선호했다. 바흐는 심지어 설교음악은 5년분이나 작곡하면서도 완결된 미사곡은 단 한 곡만 썼다. 그는 미사 음악이 필요하면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미사곡이나 자신의 칸타타를 빌려 왔다. 이론상으로만 말한다면, 역으로 미사곡이 아니라 칸타타를 빌려다 썼더라면, 그는 완전한 미사곡을 10곡 정도 창작할 수 있었겠고 그 대신 예배음악은 1년분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16세기 이후 개신교 교회음악을 부추기며 이끌어 온 어떤 본능에 따라 자신이 하던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118

    여기서 결국 음악의 역사 전체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대두된다. 몬테베르디 이후 곧 오페라가 쇠퇴하기 시작하여 점차 구성이 산만하고 드라마틱하지 않은 아리아-오페라로까지 전락하게 되었다면, 그 잘못은 음악이 아닌 문학에 있다. 문학은 음악에 합당한 재료나 형식은 제공하지 않은 채 자체의 길을 가면서, 마치 먼 옛날 성베드로가 버찌를 주워 먹었듯이, 초췌해진 음악이 허리 숙여 주워 먹도록 가끔 먹을 것을 던져 주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흐까지의 종교음악 역사도 전적으로 가사의 역사로서 오페라 역사와 짝을 이루고, 따라서 또한 슬픈 역사이기도 하다.

     

    130~131

    음악이 교육제도 안에 워낙 단단히 묶여 있어서 당시 음악인들의 교육 수준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대 예술가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대학 재학 중에, 혹은 대학 졸업 후 음악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독일의 법학계는 17세기와 18세기 초까지만 해도 최고의 음악가들을 배출했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쉬츠, 발터, 마테존, 헨델, 에마누엘 바흐를 비롯해서 많은 유명한 이름이 이 명단에 올라 있으니 당연히 자랑할 만하다.

    작곡가에게 대학 공부가 꼭 필요한가?” 요한 베어라는 사람이 1719년의 한 논문에서 제기한 질문이다. 그는 이 물음에 단호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당시 음악가들의 교양 수준이 실제로 어땠는지 알려면 미하엘 프레토리우스의 음악이론집성부터 에마누엘 바흐, 게르버, 아들룽, 마르푸르크 등의 저술까지 두루 살펴보면 된다.

    역으로, 예술과 교육이 워낙 긴밀해서 지식인들도 어느 정도의 음악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음악 덕분에 대학 공부가 가능했던 사람들은 고위직에 오르고 나서도 음악에 충성했다. 이런 예술교양의 보편화가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당시의 교회음악에 관한 공공의 관심을 설명해 준다. 당시 개신교 도시에서는 예술적인 예배가 마치 고대 그리스 시민들의 극장과 같은 의미, 즉 예술과 종교의 장소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161~162

    고트체트와 레싱 이전의 독일문학에는 이렇듯 현대적 의미의 언어감각이 없었다. 다름 아닌 이 음악과의 결합이 당시의 시예술에 해를 끼쳤다. 이 결합을 의식하여 시는 오로지 아이디어를 가장 생생하고 다채롭게 표현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고민은 하지 않은 채 과격한 형상과 격정적 표현을 학보하려고 자꾸만 감정 과잉에 휘말려 들고 말았던 것이다. 고트체트와 레싱을 통해 문학이 음악으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해 독립하면서 비로소 문학은 자신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바흐는 쇠퇴의 시대에, 음악이 시를 홀리고 시가 음악을 현혹시킨 시기, 카이저 같은 진정한 재능인도 파멸의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과도한 다작과 산만한 예술의 시기, 영구적인 것이 아닌 소모적인 것만 만들도록 운명 지워진 듯 보이던 시대에 등장했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의 독보적인 거장들이 비록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별들 사이에서 특별한 빛을 발하는 단 하나의 별이었다면, 바흐는 그 시대가그 자신마저도별빛으로 여긴 도깨비불에 둘러싸여 거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시대에 작곡되어 감탄을 자아낸 수많은 칸타타 가운데 바흐의 칸타타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 칸타타들조차 형식과 가사를 보면, 스스로 겨우 빠져나온 그 덧없음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다. 이 오류의 시대에, 그리고 이 오류와 함께하면서도 불멸의 예술을 창조했다는 사실만큼 바흐의 위대함을 증언해 주는 것은 없다.

     

    162~163

    재능 있는 사람들이 시대의 착오 속에서 착오를 범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지만 천재들이 그 착오에 얽혀 들면 수 세기에 걸쳐 대가를 치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그가 위대했기에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을 향해 가던 그리스 자연과학의 발전을 저지했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적 형식과 공식을 등에 가득 진 바흐는 무한한 힘을 의식하며 거의 무모하게 독일 음악이 나아가는 길을 막아섰다. 이 길은 그때 벌써 독일 음악을종교음악 영역에서후대의 바그너가 극음악에서 구현하는 그 예술로 인도해 갈 수도 있었다.

     

     

    168~169

    포르켈에 의하면, 큰 음악가 집안인 바흐 가문 구성원들은 서로 애틋하게 사랑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가 한데 모여 살 수 없으니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모두 만나기로 하고, 하루 날을 잡아 정해진 장소에 다 모였다. 가문의 구성원이 크게 늘어 튀링엔 이외에 오버작센과 니더작센 혹은 프랑켄 지방 등 곳곳으로 퍼져 나간 후에도 그들은 이 연례모임을 계속했다. 모이는 장소는 대개 에르푸르트, 아이제나흐 또는 아른슈타트였고, 이 모임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식 또한 실로 음악적이었다. 그들 모두가 칸토르거나 오르가니스트 또는 시악사로서 예외 없이 교회에 관계하고 있었던 데다 당시에는 어떤 행사든 종교적으로 시작하는 것이 관습이었으니, 그들은 다 모이면 일단 코랄을 불렀다. 그 모임은 이렇듯 경건하게 출발하지만 이내 경건을 심하게 해치는 농담으로 바뀌기 일쑤였다. 즉 때로는 익살맞고 때로는 야한 내용의 민요들을 즉흥적으로 섞어 함께 노래했던 것이다.

     

    170

    그런데 형이 보기에 요한 제바스티안은 배움에 지나치게 적극적이었다. 언젠가 그는 형에게 프로베르거, 케를, 파헬벨과 여러 작곡가들의 클라비어 음악이 실린 곡집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형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격자형 문이 잠긴 책장 안으로 작은 손을 넣어 그것을 꺼내 달빛 아래에서 베꼈다. 여섯 달 만에 겨우 사보를 끝냈는데, 이를 눈치 챈 형한테 그만 그 사본을 빼앗겼다고 한다.

     

    174

    그는 성공적인 교육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규율을 지킨다는 게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그는 어떤 일이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조급해했고그러면서 일만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용기를 잃고 끝내 그냥 방치하고 말았다. 합창단원이나 합창을 지휘하는 학생과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그의 이런 성정은 그가 뤼베크로 떠나기 전에 가이어스바흐라는 학생과 심각하게 충돌한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가이어스바흐는 바흐에게 욕설로 모욕당했다면서 길에서 몽둥이를 들고 바흐에게 달려들었다. 바흐도 단도를 꺼냈지만 다행히 다른 학생들이 뜯어말려 싸움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178

    궁정악단 단원은 약 20명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당시 어디서나 그랬듯이 하인이나 요리사 또는 사냥꾼직을 겸하고 있었다. 특별한 경우에 그들은 시종 복장을 하고 주인을 기다렸는데, 바흐도 아마 그런 유니폼을 입고 일했을 것이다.

     

    182~183

    이들의 결혼생활은 어느 면에서나 완전한 행복 자체였다. 안나 막달레나는 자상한 아내였고,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폈으며, 남편의 창작을 이해하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훈련으로 잘 가꾼 아름다운 소프라노 음성의 소유자였다. 바흐는 아내의 이 재능을 향상시키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생각했다. [...] 아내는 남편의 악보 정사를 도와주고, 이로써 자신을 위한 남편의 수고에 보답했다. 일련의 아름다운 바흐 작품 악보들은 그녀가 사보한 것이다. 그녀의 사보 솜씨는 해가 가면서 남편의 필체를 닮아 가 나중에는 거의 구별 못 할 만큼 비슷해졌다. 주말이 다가오는데도 새로 작곡한 칸타타의 파트보 사보가 미처 끝나지 않았을 때, 집안일을 돌보면서 사보까지 해내느라 그녀는 얼마나 분주했겠는가!

    그녀는 아이들에게도 사보 일을 가르쳤다. [...] 서투르고 뻣뻣하게 기보된 음표들은 아무리 보아도 그녀가 쓴 게 아니다. 다행히 그 성부 끝에 있는 꼬부랑글씨 세 글자 ‘WFB’가 사보를 실제로 누가 했는지 알려 준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다! 이 칸타타가 1724년에 작곡되었으니, 프리데만이 열네 살 때였다. 그러니까 이것은 소년 빌헬름이 처음으로 완성한 악보인 셈이다. 이 아이가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한번 그려 보라. 복도에 햇볕이 든다, 어머니는 주변을 바삐 서성이며 아들의 사보 작업을 살핀다, 아들은 방금 악보의 아래쪽에 Il Fine’이란 단어를 써넣었다, 그런데 그 글씨가 어머니 눈에는 별로 예뻐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크고 점잖은 글씨로 다시 한번 같은 단어를 쓴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오신다.

     

    243~244

    특히 그는 부정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의 공정함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이는 그가 참여한 여러 오르간 검사에서 여실히 나타났다. 그가 어떤 오르간 검사를 맡으면 그 관계자들은 늘 두려워했는데, 그가 엄격한 데다 어떤 잘못도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포르켈에 따르면, 오르가니스트직을 위한 오디션에서든 새로 설치한 오르간 검사에서든 그가 얼마나 양심적이며 엄정하게 처신했는지, 바흐는 그런 일을 하면서 친구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248

    누가 그에게 어떻게 하면 그런 높은 예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지 물으면, 바흐는 늘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노력해야 했습니다. 누구라도 나처럼 노력하면 이만큼은 할 수 있습니다.

     

    249~250

    바흐는 개인적 허영심을 다 버리고 위대해 보이는 모든 것에 감탄했다. 이 태도는 헨델을 대하는 그의 생각에서 이미 확실하게 증명된다. 위대한 동시대인 헨델과 개인적으로 상면하지 못한 것은 바흐 탓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살던 헨델은 고향 할레를 통틀어 세 번 방문했다. 첫 방문은 1719년경이었다. 바흐는 당시 할레에서 불과 6.5km 떨어진 쾨텐에 살고 있었다. 그는 그 유명 예술가를 만나려고 즉각 할레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는 헨델이 이미 그곳을 떠난 후였다. 헨델은 1729년에 다시 고향을 방문했는데, 그때 바흐는 이미 라이프치히로 옮긴 뒤인 데다, 크게 앓고 있었다. 그는 큰아들 빌헬름 프리데만을 헨델에게 보내 라이프치히의 자기 집으로 정중히 초대했지만 헨델은 올 수 없노라며 유감을 표했다. 헨델이 세 번째 할레에 왔을 때는 바흐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251

    바흐는 손님 대접하기를 소홀히 마라라는 격언을 충실하게 지켰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외지인이든 내국인이든 누구라도 그의 집을 방문할 수 있었고, 항상 따뜻한 접대를 받았다. 이러한 대인관계에서 행한 인덕과 예술가로서 얻은 큰 명성이 더해져서 그의 집에는 손님이 끊긴 적이 거의 없었다고 포르켈은 기록하고 있다. 널리 흩어져 있던 친척들이 학업을 위해 라이프치히에 와 있을 때 바흐를 방문하면 그는 그들을 언제나 정성스럽게 대접했다.

     

    252~253

    바흐는 돈 문제에서 매우 정확했다. 그가 대학교회 일로 괴르너와 싸울 때도 돈 문제를 내세웠었다. 에르트만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는 1729년에 사망자 수가 적어 수입이 준 것에 불만을 털어놓으며, 그해에 라이프치히 사람들이 별로 죽고 싶어 하지 않아 결국 장례식 수입이 100탈러나 줄었다고 불평하고 있다. 프로이센 푸가한 부를 부탁한 슈바인푸르트의 사촌 엘리아스 바흐에게는 이 푸가가 지금 절판되었으니 몇 달 후에 다시 한번 문의하고…… 그리고 그때 악보 값도 함께 보내 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696

    바흐는 성경의 뜻을 파악할 때 통설을 따르지 않았고, 자신만의 깊고도 독특한 감각에 의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마태수난곡가운데 최후의 만찬 성체제정 어구의 음악적 해석은 경이롭다. 여기에 슬픔의 흔적은 없다. 음악에 평화와 위엄이 흐른다. 마지막에 다가갈수록 베이스의 8분음표 움직임은 점점 더 당당해진다. 예수는 빛나는 모습으로 제자들 앞에 우뚝 서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들과 함께 하늘나라의 만찬의 술잔을 다시 들게 될 날을 예언한다. 바흐는 이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흐는 이 장면에 대한 종래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예술적 직관으로 당시의 신학자들보다 더 올바른 해석을 내린다.

     

    704

    바흐가 표현하려는 감정은, 다른 음악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그의 음악에서 강렬하게 표출되면서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떤 감정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윤곽과 뉘앙스를 성격화하는 바흐의 능력이야말로 유일하다 할 만큼 특별하다.

    따라서 바흐는 바그너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그의 음악 역시 가장 진실하고 심오한 감정음악이다. 이 두 대가 모두 시의 사상을 음악 안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그들 모두 자신들의 작품에서 표제음악, 즉 시를 단순히 묘사하는 표제음악을 거부하고, 또한 음악적 표현의 실제적 영역을 철저히 지킨다.

     

    717

    그러나 시적 음악과 회화적 음악을 음악의 동등한 두 기본 양식으로 인정하면, 우리는 바흐의 간결한 감정언어와 형상언어를 베토벤과 바그너가 이미 추월해 버린 어떤 원시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종류상 다른 음악언어의 완벽한 형태로 보게 될 것이다.

    바흐 칸타타의 음언어와 가장 가까운 친근성을 보여 주는 것은 회화적 연상을 적극 사용한다는 점에서 슈베르트 가곡의 반주의 음언어다.

    바흐만의 유일한 특성은 그의 언어의 선명성과 완벽성이다. 그 언어의 구성 요소들은주로 형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에베토벤과 바그너의 경우보다 훨씬 정확하게 표현해 낼 수 있다.

     

    808

    음언어에서 리듬은 대개 자음의 입장을 취하고 음정과 화음은 리듬에 울림 Sonorität을 부여하므로 모음의 입장을 취한다고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 비유가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면, 특히 바흐의 음언어에는 정확히 들어맞는 비유라 하겠다. 음정이 해당 리듬에 부여하는 음세音勢는 표현될 감정의 특성을 규정한다. 바흐의 경우 이 음정 역시 매우 중요하다. 다만 이 음정을 일일이 관찰하여 전체적으로 종합하는 작업이 리듬의 경우보다도 훨씬 어렵다. 그렇지만 바흐는 즐거운 분위기를 표현할 때는 6도 도약을 예사로 했고 불쾌감이나 혐오감 같은 것은 감3도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바흐는 눈에 뜨일 만큼 심하게 뒤틀린 불협화음을 고통과 놀라움을 표현하는 데 사용했다.

     

    1064~1065

    바흐의 모테트에 담겨 있는 음악적 아름다움은, 주께 새 노래를 불러 드리자를 듣자마자 바흐의 위대함을 간파한 모차르트가 증언해 준다.5 한편 첼터는 괴테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만약 괴테가 바흐의 모테트 연주회에 한번 참석한다면 아마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한기분을 느낄 거라고 말한다.6 실제로 그렇다. 모테트의 음들이 울리기 시작하면 불안과 걱정, 슬픔의 이 세상은 서서히 사라진다. 그리고 듣는이와 바흐 단 둘만 남는다. 바흐는 이제 가슴에 품고 있던 따스한 평화로 듣는이의 영혼을 달래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존재 위로 끌어올린다. 이윽고 음악이 사라지면 듣는이는 모두 조용히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바흐가 이 세상에 남긴 선물에 감사한다.

     

    1184

    바흐에게 프레이징은 주제와 악절에 생명과 기운을 불어넣는 핵심으로서 그의 프레이징에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 만약 이 특성을 무시하고 모든 음악에 통용되는 보편적인 프레이징을 그대로 적용하면 그 음악 구조는 이상하게 굼뜨고 질긴 성격으로 변한다. 또한 색깔도 흐려지고 윤곽은 불분명해진다. 듣는이는 개개 성부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난해하고 피곤하게 만드는 뒤죽박죽된 현상만 듣게 된다. 결국 작품이 지닌 활기찬 인상은 사라지고 만다.

     

    1198

    지휘자는 파트보에 레가토 선과 스타카토 점을 적어 주는 데 그치지 말고 연주자들에게 바흐 프레이징의 특성을 설명해 줘야 한다. 만약 연주자가 토마스칸토르의 음표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마디 박절을 넘어서는 형태로 그룹 짓는지 전혀 감도 없고 생각도 못 한다면, 정확한 바흐 음악 연주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의 연주자는, 효과적인 바흐 음악 프레이징을 위해 풍부한 프레이징 방법과 함께 악센트의 다양함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현대 오케스트라가 바흐의 의도를 충족시켰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전혀 실현하지 못하는 원인은, 레가토 선과 스타카토 점의 외양은 잘 관찰하면서도 개별 음표들을 결합하여 활기찬 음표 그룹을 만들어 내는 악센트 처리는 거의 흉내조차 못 내기 때문이다.

     

    1225

    오늘날 많은 여성 독창자가 아리아 연주에서 보여 주는 여성적 감수성은 바흐의 의도와는 매우 거리가 멀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언젠가는 다시 소년 음성의 자연스런 가벼움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이 목소리로 노래하는 젊은 바흐 가수를 육성하는 때가 오기 바란다. 그러면 소년의 노래는 반드시 무표정해야 한다는 선입견도 오해임을 알게 될 것이다.

     

    1238

    반대로, 바순을 넣어 연주하라는 기록이 없다고 해서 합창곡에서까지 바순으로 베이스 파트를 보강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합창곡에서는 바순이 필요하다. 노래 성부의 편성이 강하면 하나가 아닌 두셋이 가세해도 좋다. 좋은 효과를 낼 수만 있다면 바순은 아리아의 투티에서도 쓸 수 있다. 즉 바이올린과 비올라에 목관악기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바순을 사용할 수 있다.

    이외에도 편성과 관련해서, 총보나 파트보에 어떤 구체적인 지시가 없더라도 바흐에게 관례였다면 우리는 그에 준해서 많은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다. 토마스 단원들이 어떻게 연주했을지 그 사정을 한번 상상해 보자. 그들은 꼭 필요한 만큼만 필사한 파트보를 가지고 어떻게든 연주를 해야 했다. 심지어 합창곡의 노래 파트는 대개 성부마다 각 한 부만 만들었다. 악기 주자들은 대부분 서서 연주했고, 자기 파트를 반쯤은 외우고 있었다. 즉 아리아의 투티에서는 필요에 따라 다른 악기가 같은 파트보로 함께 편하게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61

    오늘날의 호른과 관련해서, 바흐가 알고 있던 악기는 17~18세기의 전환기에 파리에서 사용되던 단순한 코르노 다카치아, 즉 사냥호른뿐이었다. 그래서 호른 주자는 바흐를 연주할 때 트럼펫 주자처럼 고음역에서는 특별한 마우스피스로 클라린 취주를 해야 했다. 따라서 바흐 음악의 경우 호른은 실제로 호른이라기보다는 호른 형태의 트럼펫이라고 해야 옳다. 오늘날의 호른 소리는 바흐가 생각했던 음향보다 무겁다. 고음역에서 움직이는 호른 파트는 호른과 트럼펫으로 나누어 연주하면 좋은데, 이는 아주 특출한 호른 주자만이 그 고음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1295

    열렬한 바흐 애호가인 브뤼셀 음악원 원장 제바에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토마스칸토르의 음악은 마치 복음 같습니다. 사람들은 복음 내용을 다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보고 압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서로 큰 차이를 보이지만 그럼에도 다같이 복음을 전해 줍니다. 그들로부터 복음을 구하는 자는 누구나 그것을 찾고, 그것을 또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바흐의 음악도 이와 같습니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음악에서 자기 자신이 아닌 바흐를 찾고, 이로써 인류에게 어떤 값진 것, 즉 예술적 감각만이 아니라 영적이며 정신적인 의미의 값진 것을 전해 준다는 경건한 의식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음악이 설령 다르게 울리더라도 언제나 진정한 바흐인 것입니다.”

     

     

     

    지은이

     

    알베르트 슈바이처 Albert Scweitzer

    1875년 알자스로렌의 카이저스베르크에서 태어나 1965년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에서 세상을 떠났다. 슈트라스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 뒤 파리에서 샤를 마리 비도르에게 오르간을 배웠고, 1896년 처음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경험한 뒤 바그네리안이 되었다. 1899년에는 칸트의 종교철학으로 철학박사학위를,1901년에는 성찬식에 대한 역사적 고찰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1902년에는 신학 교수자격시험에 통과했고 슈트라스부르크의 니콜라이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1905년에 비도르의 격려로 프랑스어로 바흐 전기를 쓴 그는1908년 이를 확장한 독일어판 단행본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출간했다.

    1905년부터 1913년까지 슈바이처는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의 선교를 목적으로 약학공부에 매진했고1913년 가봉의 랑바레네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그는 이때부터 저술, 강연, 오르간연주, 음반 등에서 얻은 수익으로 병원을 세우고 자비로 운영하며 숲의 의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평생 평화주의자로 살았고, 바흐의 음악을 사랑했다.1957년부터는 라디오와 기고를 통해 반핵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1952년 노벨평화상을, 1955년 영국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옮긴이

     

    강해근

    서울대학교 음악대학과 독일 뮌헨 음악대학에서 첼로를 공부했다.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관현악과 교수로 재직하며 음악대학장을 역임했고,2002년부터 7년간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국제바흐페스티벌바흐심포지엄을 기획하여 2011년 까지 이끌었다. 역서로는 니콜라우스 포르켈의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2005/2020),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바로크 음악은 말한다(2006), 마르틴 게크의 바흐의 아들들(2012) 등이 있고,역사주의 연주의 이론과 실제(2006),

    바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들(2007)등의 책임 편집을 맡았다.

     

    나진규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회음악을,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음악학, 신학, 종교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에는 한국찬송가공회에서 전임간사로 활동하며 21세기찬송가(2006)의 편집 실무를 담당했으며, 장신대, 목원대, 백석대, 연세대에서 강사를, 호남신학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한국인 찬송가의 역사(2001), 21세기 찬송가 해설집(2012), 바흐의 오르간음악, 전곡해석(2012), 찬송가학(2013), 교회음악개론(2014), 한국가곡의 이해(2015),21세기 찬송가의 한국인 작품들, 분석과 해설(2019), 바흐의 교회음악(2020)등이 있다.

     

    장견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음악학 박사 학위를받았다.가천대,서울대,성신여대에서 강사로 재직했고, 조성 구조로 본 슈만의 연가곡 구상,

    쇤베르크의 초기가곡, 모차르트 현악사중주KV 387에 나타난 그의 고전양식등 다수의 논문을 집필했다.

     

     


     





     


    도서명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저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출판사 풍월당
    크기 152*215
    쪽수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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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작성자
      김은경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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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작성자
      조설아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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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작성자
      정윤석
      작성일
      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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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작성자
      채은석
      작성일
      2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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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작성자
      김지혜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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