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네 아들
그들이 남긴 유산과 음악사적 의의를 조명하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활동하는 동안 그의 위대성을 바르게 인식한 전문가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바흐는 사후 빠르게 잊혀 갔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은 네 아들은 천재적 재능을 지녔음에도 힘겨운 삶을 살거나(빌헬름 프리데만), 아버지의 후광에 기대어 출발하여 마침내 음악의 새로운 변화를 선도하며 큰 명성을 누리거나(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또는 소박하게 한 자리에 머물며 시류의 변화를 따르고(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일찍이 독일을 벗어나 아버지와는 다른 영역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요한 크리스티안), 각기 다른 삶을 살았다. 비록 삶의 모습은 달랐지만 그들은 “형이 작곡하기 위해 살았다면, 나는 살기 위해 작곡했다”는 막냇동생의 고백처럼 모두가 치열하게, 애써 쟁취한 자리에서 자신들의 주변 환경을 개척하고 때로는 돌파해 가며 한 시대를 앞장서 헤쳐 나갔다. 그들은 ‘갈랑’, ‘감정양식’, 혹은 ‘전고전주의’로 불리는 한 시대의 주역이었고, 그럼으로써 고전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의 물꼬를 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최근 새로이 조명 받고 있는
바흐의 아들들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일으킨 저작
바흐의 네 아들이 차지하는 이러한 역사적 위치와 의미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편협함 때문이다. 음악학계가 그 시대를 과도기로 자리매김하면서 우리는 오랫동안 그 시대와 그들의 음악을 진지하게 대하지 못하고 그저 부수적인 것으로, 가벼운 것으로 치부해 왔다. 우리는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하이든과 베토벤에게 끼친 영향이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를 사숙한 모차르트의 경우 등 그들의 시대적 역할에는 주목했으나 정작 그들이 추구했던 음악적 이상에 대해서는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못했고, 그들이 남긴 작품들의 예술성을 바르게 평가하는 일에도 크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우리 곁에서 멀어졌고, 낯선 음악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 모두가 ‘과도기’를 대하는 우리의 편협한 자세의 결과다.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는 바흐의 네 아들을 대할 때 좀더 공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마르틴 겍이 이 작은 책을 펴내며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바흐의 네 아들: 서로 다른 삶, 서로 다른 음악
네 음악가의 개성을 흥미진진하게 포착하다
저자 마르틴 겍은 바흐의 네 아들의 개성을 탁월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의 관계, 그에게서 물려받았을 재능과 기질적 요소를 연결시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먼저 빌헬름 프리데만은 즉흥연주에 뛰어난 독일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아버지의 작곡 방식을 독창적으로 계승한 불운한 천재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버지 바흐가 가지고 있었던 천재성과 더불어 직무상의 무능이 함께 있었고, 이것이 그를 실패로 이끌었다. 반면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의 경우에는 아버지 바흐의 사교성과 지칠 줄 모르는 근면함, 커리어를 가꿀 줄 아는 수완이 있어 출세와 성공을 가능케 했다. 그는 아버지 바흐가 동시대 신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한 것처럼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계몽주의적 신념을 널리 알리는 작품들을 써서 시대의 선구자가 되었다. 마르틴 겍은 클라비어 소나타, 협주곡, 오라토리오, 가곡 등을 아우르는 그의 넓은 음악 세계와 후대에 미친 영향을 인상 깊게 서술한다.
뷔케부르크에서 활동한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는 이 책에서 다뤄지는 바흐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덜 알려진 인물이다. 비록 대중적 성공이나 음악가 사회에서의 명망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겍은 그를 “미학적 수준에서 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성숙기의 빈 고전주의로 다가선” 작곡가라 묘사한다. 한편 ‘런던 바흐’로 잘 알려진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아버지가 가보지 않은 길을 간 아들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성공하고 대영제국의 수도에 정착한 그는 당대 가장 성공한 오페라 작곡가였다. 겍은 아버지에게 잠재되어 있던 극음악적 재능이 이 아들에게서 발현된 것이라고 지적하며 “그의 음악의 본질인 경쾌함과 여유로움”이 빈 고전주의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바로크와 고전주의 사이 시기에 대한 간명한 조명
바흐의 네 아들은 전고전주의 시기의 대표 음악가
그동안 국내에서도 바로크 및 고음악 공연과 음반이 늘어나면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음악사의 시대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증가해 왔다. 이 책은 바흐의 네 아들의 활동을 서술하면서 자연스럽게 바로크와 고전주의 사이 시기를 조명한다. 바로크적/교회적 질서가 해체되고 계몽적/시민적 질서가 새롭게 형성되던 이 시기의 역동적인 모습은 바흐의 네 아들의 삶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버지 바흐의 유산을 물려받은 네 사람은 사실상 모두 나름대로 음악적 측면에서 탁월했다. 다만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고 그 시대에 맡겨진 과제를 얼마나 명확하게 인식했는가에 따라 그들의 평가가 달라졌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바흐의 네 아들은 우리가 그동안 잘 모르고 있던 ‘전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적 초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차례
프롤로그: 두 어머니: 마리아 바르바라와 안나 막달레나
딱한 천재: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그 시대의 전형: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초라한 비르투오소: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현세주의자: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에필로그: 바흐의 두 손자: 빌헬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저자주
연대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직계 후손 계보
바흐의 네 아들에 관한 주요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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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소장처 – 출처
부록: 바흐 가문의 계보
개정판을 내며
옮긴이의 말
책 속에서
7쪽
1707년 10월 17일 마리아 바르바라가 아른슈타트 근교 도른하임에서 혼례를 올릴 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셋이었다. 이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은 그녀의 6개월 연하 재종再從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다. 신부의 아버지 요한 미하엘 바흐는 게렌을 중심으로 활동한 저명한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였는데 1694년에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그 곳 시청 관리 집안에서 태어난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러나 마리아 바르바라는 일찍 양친을 여의고 두 언니와 함께 아른슈타트 시장인 친척 마르틴 펠트만의 보살핌 아래 자랐다.
9-10쪽
짐작건대 바흐는 이 바이센펠스의 궁정 트럼펫 주자 요한 카스파르 빌케의 딸을 자기가 직접 나서서 쾨텐으로 영입했을 것이다. 그 경위야 어찌 되었든 서른여섯 살의 이 홀아비는 1721년 12월 3일 16세 연하의 처녀와 결혼하고, 이로써 어린 네 자녀들의 새어머니를 맞이한 데다, 한 프로성악가 아내를 얻게 되었다.7 그녀는 아마도 유명한 여성 성악가 크리스티아네 파울리네 켈너에게 전문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훈련받은 어엿한 성악가 안나 막달레나에게 이 결혼은 곧 예술 활동의 제한을 뜻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든든한 담보를 확보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13쪽
그렇지만 그녀는 어느 무엇보다도 어머니였다. 그녀가 제일 먼저 보살펴야 할 대상은 슬하의 자식들이었다.7 남편의 첫 결혼에서 태어난 네 아이가 있고, 자신이 낳은 열세 아이 중 열한 명이 결혼 후 13년 동안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아이들 가운데 여섯 명만 살아남아 성인이 되었다.
21쪽
1710년 11월 22일에 태어난 빌헬름 프리데만은 아버지의 귀염둥이였음에 틀림없다. 이런 인상이 드는 것은, 다름 아니라 아버지 바흐가 아들을 가르치려고 만든 교재들이 동생들 것보다는 이 맏이를 위한 것이 더 많이 남아 있어서 그렇다.
28쪽
프리데만 바흐와 할레의 교회 관계자들 사이에 일어난 불화는 그의 음악의 질 때문이 아니었다. 그 갈등은 그가 교회의 헌금을 횡령한 칸토르에게 책임을 물으며 싸우다가 빚어졌고, 그가 허가 없이 여행을 떠났다거나, 함부로 팀파니를 빌려주었다는 등 사소한 이유로 일어난 것이다. 천재의 시대에 깊이 영향을 받은 후세대가 “몇몇 음악 영웅의 전설”에 집착하면서 그런 이상한 사건들을 골라내어 거창하게 부풀려 프리데만 바흐를 한 천재적 주정뱅이 내지 괴짜로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할레에서만큼은 전반적으로 정갈한 몸가짐을 보였을 것이다.
36쪽
이 바흐의 맏아들은 생애 마지막 몇 해 동안에 기이한 모습까지는 아니지만 어떻든 딱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는 아버지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악보 원본을 파는 일에서, 옛 문헌들이 한결같이 그의 책임이라고 뒤집어씌우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렇게 무책임하게는 행동하지 않았다. 그가 늘 돈 걱정에 시달린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오히려 그것들을 조건에 맞는 경우에 한해서만 멀리 내다보며 전략적으로 팔았다. 따라서 현대의 바흐 연구는, 비록 그 대부분이 유실되긴 했으나, 프리데만 바흐가 물려받은 유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복잡하게 뒤얽힌 행방을 밝혀 재구성해 내는 데 노력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41쪽
안나 아말리아 공주에게 헌정한 여덟 곡의 푸가는 아버지의 푸가 예술을 이어받았고, 전해 오는 환상곡 열 곡은 독창성 면에서 주목을 끈다. 이 곡들은 어떤 것도 서로 비슷하지 않고 곡마다 다 다르다. 이 모든 곡이 온통 ‘속임수’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듣는이를 깜짝 놀라게 하는 변화를 뜻하는 이 수법을 즐겨 쓰면서 아주 좁은 공간 안에서 음악의 성격을 완전히 뒤집지만 그러한 음악을 수긍하게끔 만드는 작업에서 묘한 기쁨을 느낀 것 같다. 그 밖에도 「순수한 작곡법 Reine komposition」 몇 장章이 있는데, 이것들은 19세기를 앞서 가리키고 있다. 포르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종이 위에 기록하기보다 즉흥연주를 더 좋아하여 음악의 아름다움을 상상력 속에서만 탐구하였다.
49쪽
둘째로 태어난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형보다 훨씬 수월하게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에게 유리했던 상황을 어렵지 않게 재구성해 낼 수 있다. 그는 우선 주변의 기대로 인한 압박을 덜 받았고, 형 빌헬름 프리데만이라는 바람막이 뒤에서 안전하게 자신을 발전시켜 갈 수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당시 음악계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인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이라는 대부가 있었다. 그 텔레만처럼, 그러나 맏형과는 전혀 다르게 그는 길고도 성공적인 삶의 행로를 걸으며 가정을 잘 꾸려 갔고, 20년 동안 한자동맹 도시인 함부르크의 문화예술계를 함께 이끌고 결정지으면서 북독일을 넘어 유럽의 전 지역에서 ‘위대한 바흐’로 불리었다. 또한 당대 음악학자들에게 그는 안전하고 노련하게 역사의 조각배를 저어 구시대의 바흐와 헨델에서 하이든과 베토벤이 활약하는 새로운 세계의 연안으로 인도하는 인물이었다.
57쪽
에마누엘 바흐는 이미 베를린 시절부터 시민을 위한 음악문화에 다가가는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프로이센 궁정의 정규직을 얻은 해에 벌써 베를린의 니콜라이교회 오르가니스트 선임을 위한 심사위원 명단에 그의 이름이 보인다. 그의 오케스트라 작품은 베를린의 정기 연주회 프로그램에 오르고, 클라비어곡과 실내악곡도 시민 계층에서 연주되었을 게 분명하다. 다시 말해 다양한 민간기구가 적절한 시기마다 ‘아카데미’, ‘음악실천 협회’, ‘음악적 모임’과 같은 이름으로 개설되고 있었고, 그 명칭들이 말해 주듯이 거기에서는 교양과 사교를 위한 시민적 단합이 중요한데, 그것은 전적으로 에마누엘 바흐가 뜻하는 바였다.
69쪽
에마누엘 바흐에게 연주자란 작곡가가 표현한 감정을 악기를 통해 표출해 내는 예술가였다. “연주자가 스스로 감동받지 못하면 타인을 감동시킬 수 없다. 따라서 연주자는 청중에게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그 감정에 자신을 몰입시켜야 한다. 연주자는 청중에게 자기의 감정을 이해시키고, 최상의 방법은 청중을 자기의 감정에 공감하도록 끌어들여야 한다. 연주자는 지치고 슬픈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스스로 지치고 슬퍼야 하고, 청중은 연주자의 모습에서 그것을 보고 들어야 한다. 이것은 격렬함, 유쾌함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감정에도 똑같이 나타나야 한다. 청중을 진정시켰다가 곧 고양시키며 열정을 갖고 끊임없이 변화를 꾀해야 한다.”
92쪽
젊은 동료들 역시 가끔 에마누엘 바흐의 경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베를린의 음악가 퀴나우는 유익한 조언을 듣기도 하였다. “일반인용으로 출판할 작품이면 그대는 조금만 예술적이시고 되도록 설탕을 많이 넣으시오. […] 인쇄하지 않아도 되는 작품이라면 그대는 그대의 근면을 모두 발휘하기 바라오. 도움이 될 만한 비평에 관해서는 내가 나서서 돌봐 주리다.”67 바흐는 ‘고객’의 예술적 요구와 테크닉적 능력 사이의 문제를 이처럼 스스로 알아서 조절하였다.
105쪽
에마누엘 바흐는 실로 놀라운 인물이었다. 그는 분명히 선구자적 음악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작곡가로서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예술가 사회에서, 그리고 문학가와 신학자 그룹에서도 중심 역할을 한 최초의 음악가였다. 이런 정도까지의 변화는 음악이 낭만주의 시대로 들어서기 전에, 즉 감정양식의 시대에 이르러 이미 여러 예술장르 사이에서 그 위상이 특별히 높아졌기에 가능하였다. 에마누엘 바흐는 여기에 본래부터 가진 본인의 장점을 보태었다. 그의 교양과 예술 전반에 대한 감각, 책임감, 조직력, 성취욕, 한없는 근면함이 그것이다. 민족적 자긍심도 필요한 만큼 힘을 발휘해 이제 그는 적어도 북독일 지역에서만큼은 당대 최고의 바흐가 되었다. 그는 그렇게 동시대인들의 기억에서 아버지 바흐의 이름을 지워 버렸다.
109쪽
그렇지만 예술은 특유의 긴장상태를 원숙한 형태로 품고 있어야만 역사에 길이 남는 신화가 되는 법이다. 개인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내용과 형식, 감성과 이성 사이의 긴장상태 말이다. 음악의 흐름상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 에마누엘 바흐에서 초기 낭만주의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다시 말하자면, 서로 접해 있는 이 동질적 두 블록 사이에 빈 고전주의가 끼어든 것은 음악의 역사가 만들어 준 귀중한 선물이었다.
127쪽
우리는 프리드리히 바흐를 일개 말단 궁정 음악가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좁고 답답한 뷔케부르크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하였다. 1766년 10월 하노버의 호텔 겸 연주홀 ‘런던 솅케London Schänke’에서 음악회를 열었고, 그 프로그램에 이탈리아식 칸타타와 새로 작곡한 클라비어 협주곡을 올렸다. 이듬해에는 명성이 높은 함부르크 칸토르직에 지원했으나 그 자리는 이복형 에마누엘 바흐의 차지가 되었다.
137쪽
프리드리히 바흐 역시 에마누엘 바흐처럼 악보를 팔기 위해 지역별로 판매책을 고용하고, 형에게도 그 지역을 맡겼다. 그러나 예약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게다가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초판 600부가 판매회사가 파산할 때까지도 대부분 재고로 남아 결국 이 사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코펜하겐의 카펠마이스터 요한 페터 아브라함 슐츠의 진심 어린 격려가 있어서 다소나마 위로를 받았다. 슐츠는, 그 소나타들이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보다 기술적 수준이 훨씬 높고 애호가를 위한 당대의 다른 음악들보다 재치가 넘친다며 칭찬하였던 것이다.
145쪽
우리가 만약 뷔케부르크의 바흐를 다만 처세에 능하고 여러 장르를 탁월하게 다루었으며 무엇보다 클리비어 음악을 깊이 탐색한 에마누엘 바흐의 축소판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그에게 참으로 심하게 부당한 처사임을 알려 주고 있다. 우리에게 일부만 단편적으로 전해 오지만, 프리드리히 바흐의 작품 중에는 질적으로 함부르크의 형에게 견줄 만한 곡들이 여럿 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대로,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는 미학적 수준에서 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성숙기의 빈 고전주의로 다가선 작곡가였다.
158쪽
‘기분 좋은 청각적 자극’이라는 말은 크리스티안 바흐가 이탈리아 시절 초기에 ‘감행한’ 음악적 이중생활과도 연관이 있다. 크리스티안 바흐는, 아마도 그의 후견인인 리타의 뜻에 따라 열심히 교회음악을 작곡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오페라에 몰두하였다.
168쪽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크리스티안 바흐 같은 유력자를 즉각 알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바흐의 아들 역시 어린 볼프강 아마데우스에게 매혹당했을 테고, 틀림없이 그들이 수월하게 궁정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주선해 주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를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들 둘의 즉흥연주 모습을 알려 주고 있으니 말이다. 난네를의 보고에 따르면, 크리스티안 바흐는 어린 모차르트를 “다리 사이에 앉히고, 한 사람이 몇 마디를 치면 다음 사람이 이어받는 식으로 함께 소나타 한 곡을 다 연주하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곡을 한 연주자가 친 줄로 알았다”고 한다.
181~182쪽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가 속했던 시대의 정신은 이제 그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우리는 동생의 음악은 귀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언정 가슴은 공허하게 할 뿐이라던 에마누엘 바흐의 비난을 익히 안다. 우리가 만약 이 발언에 담긴 윤리적 평가를 간과한다면,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새로운 희극적 음악’에 대한 회의만 남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 자리에 특히 모차르트가 구체화한 ‘고전주의 양식’이 깊숙이 뿌리를 내린다. 즉 음악언어의 유연성과 직접성, 자발성, 그리고 불연속성도 자의恣意의 결과가 아니라 독창적이고 견실한 한 음악가의 자유로운 전개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만약에 모차르트가 없었다면 크리스티안 바흐는 그의 음악의 본질인 경쾌함과 여유로움을 앞세워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음악가로 자리매김 되었을 것이다.
184쪽
에마누엘 바흐는 하이든과 베토벤을 통해, 그리고 크리스티안 바흐는 모차르트를 통해 빈 고전주의에 크게 기여하였다. 에마누엘 바흐는 그 질풍노도를 헤치고 용감하게 노를 저어 동시대인들을 이쪽 해안에서 저쪽으로 안전하게 실어 나른 사공이었다. 반면 크리스티안 바흐는 약속된 황금의 단서를 제대로 쫓은 용감한 모험가였다. 따라서 이 두 음악가가 없었다면 이른바 빈 고전주의는 그 보편적 가치를 창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 지은이
마르틴 겍(Martin Geck)
뮌스터대학교, 베를린대학교, 킬대하교에서 음악학, 신학, 철학을 공부하였다. 1962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66년 <바그너 작품 전집>의 첫 편집자로, 1970년에는 교과서추판사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여러 음악이론서들을 썼다. 1976년에 도르트문트대학교 음악학 교수로 임용되어 1996년부터는 국제 도르트문트 바흐 심포지엄의 회장직을 맡았다. 2001년에는 글라임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독일 음악사 및 문화사에 관한 그의 여러 저서들은 15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최근의 대표 저서로는 『바흐의 생애와 작품』(2000), 『베토벤에서 말러까지: 19세기 대 작곡가들의 삶과 작품』(2000),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2000), 『루트비히 판 베토벤』(2000), 『낭만주의와 복원 사이: 1848~1871 현실주의 논쟁에서의 음악』(2001), 『리하르트 바그너』(2004), 『모차르트 전기』(2005), 『로베르트 슈만: 낭만주의의 인간과 음악가』(2010) 등이 있다.
옮긴이
강해근
서울대학교 음악대학과 독일 뮌헨 음악대학에서 첼로를 공부하였다.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관현악과 교수로 재직하며 음악연구소 소장과 음악대학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명예교수다. 음악연구소장 재임 중 2005년에 「국제 바흐 페스티벌」과 「바흐 심포지엄」을 시작하여 2011년까지 이끌었다. 이를 통해 바흐 음악의 핵심이면서도 소외되어 있던 그의 칸타타 등 교회음악을 알리고, 옛 음악을 연주하는 새로운 방식인 당대연주를 국내에 정착시키는 일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니콜라우스 포르켈의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2005), 『바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들』(2007, 책임편집), 마르틴 겍의 『바흐의 아들들』(2012, 공역),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2023, 공역), 그리고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바로크 음악은 ‘말’한다』(2006), 『역사주의 연주의 이론과 실제』(2006, 책임편집) 등을 펴냈다.
나주리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독일 마부르크대학교에서 음악학 석사학위를,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음악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관현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바흐의 ‘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소나타’의 푸가들. 그 작법과 의미의 특이성에 대하여」,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종교적 성악작품에 나타나는 악기의 상징성: 칸타타와 수난곡의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중심으로」, 「후기 베토벤의 대위법적 언어, 그리고 바흐> 베토벤의 후기 현악4중주 op.130을 중심으로」 등이 있고, 저서로는 『메세나와 상상력/근대 유럽의 문학과 예술 후원』(공저), 역서로는 『베토벤』(공역), 『바흐의 아들들』(공역),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해제) 등이 있다.
도서명 | 바흐의 네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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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마르틴 겍 |
출판사 | 풍월당 |
크기 | 135×210mm |
쪽수 | 248쪽 |
제품구성 | 양장본 |
출간일 | 2023-12-04 |
목차 또는 책소개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네 아들 , 그들이 남긴 유산과 음악사적 의의를 조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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