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음악이, 혹은 그 어떤 다른 예술 형태라도, 그 자체로 해답이 될 거라고 느낀 적이 없다. 음악가는 먼저 인간이며, 삶에 대한 그의 태도가 그의 음악보다 중요하다. 그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나는 예술가다. 그러나 내 예술을 실행함에서 나는 일개 육체 노동자일 뿐이다. 평생을 그래왔다.” _ 파블로 카살스
“이 작은 책은 비단 음악을 사랑하는 분들뿐만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분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 담긴 소박한 지혜의 말들은 파블로 카살스 생전만큼이나 지금도 진실한 울림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_ 엮은이 줄리언 로이드 웨버
“그는 다른 필멸의 인간들이 포기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했다. 자신의 기교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던 그는 오로지 음악에 대해서만, 그리고 작곡가가 전달하려 한 메시지만 생각했다. …… 그는 정신과 영혼을 다해 따라야 할 자세의 표상이다.” _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
“카살스는 단순히 독보적 첼리스트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예술가였다. 그는 또한 바흐가 살아 있었더라면 아마 그랬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즉 삶과 예술이 일체를 이루는 완전한 사람 말이다.” _ 첼리스트 폴 토르틀리에
세계적 음악가 동료들로부터 이런 찬사를 받는 이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클래식 음악의 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대개 우리가 한평생 주변에서 거의 접하기 힘든 수준의 성취를 이룬 천재들이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사람조차 성장한 후 희미하게 잊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등장 이전과 이후가 나뉘는 우뚝한 인물 역시 드물게 나타난다. 사람의 목소리를 가장 닮았다는 악기, 첼로 분야에서는 파블로 카살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오늘날의 첼로 연주는 그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카살스와 함께 첼로는 다른 악기들을 저음으로 뒷받침해주던 악기에서 독주할 수 있는 악기로 영역이 확장되었다. 음악평론가 하비 색스는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첼리스트 중에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카살스가 남긴 혁신의 혜택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했다.
4세에 피아노를, 7세에는 바이올린을 다뤘던 그는 11세에 첼로 연주를 처음 듣고 그 악기와 사랑에 빠졌다.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하기 시작한 이래 불과 두어 해만에 연주법을 혁신적으로 개량했고(오늘날에는 모두 그 방식으로 첼로를 연주한다), 이십 대 초반에 그 분야를 대표하는 세계적 음악가의 반열에 오른다. 13세에 바르셀로나의 고악보점에서 발견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꾸준히 연습하여 단편적으로 연주될 뿐 거의 잊혔던 곡을 널리 알려 인기 있는 정규 레퍼토리의 자리에 올렸고 세계 최초로 전곡 녹음했다(1936~1939, EMI). 자신의 인지도를 활용하여 노동자들을 위한 음악회를 꾸준히 열고, 사비를 털어 고향에 정상급 오케스트라를 키워내고, 조국을 장악한 독재 정권에 과감히 맞섰던 위대한 음악가였다.
이 책 《파블로 카살스의 마스터 클래스》는 뛰어난 음악가이자 정상급 첼리스트인 줄리언 로이드 웨버가 파블로 카살스를 다룬 글과 단편들을 모두 섭렵하고 하나하나 정성껏 모아 엮은 것으로, 존경하는 카살스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웨버는 세계적 뮤지컬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동생이기도 하며 한국에도 애정이 깊다. 그가 1996년 국내 발매한 앨범 〈자장가Cradle song〉에는 우리 자장가(김대현 곡, 김영일 시)도 포함되어 있다.)
파블로 카살스 Pablo Casals, 1876-1973
예술가의 책무와 헌신을 강조하고 실천한 20세기 첼로의 거장이다. 1890 바르셀로나 고악보서점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발견하고 입수해 모음곡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연주회용 레퍼토리로 격상시켰으며, 모음곡 전곡을 최초로 녹음(1936-1939)했다. 1876년 12월 29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친에게 음악을 배운 뒤 바르셀로나 시립음악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첼로 수업을 받았다.
1899년 파리에서 라무뢰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독주자로 입지를 굳혔고, 1901년에는 80여 회의 미국 순회 연주를 했다. 이후 티보, 코르토와 함께 카살스 삼중주단을 결성해 1937년까지 왕성한 연주와 녹음 활동을 펼쳤다. 사재를 털어 ‘파우 카살스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노동자연주회협회를 만들어 노동자를 위한 음악회를 열었다. 이후 프랑코 독재 정권과 서방의 모호한 태도에 항거하며 한동안 공개 연주를 거부하고 프랑스 프라드에 은둔했다.
1950년 바흐 서거 200주년 기념 연주를 계기로 프라드에서 연주를 재개했고 이후 프라드 페스티벌과 푸에르토리코 카살스 페스티벌을 이끌었다. 1971년 유엔 총회에서 자작곡 〈유엔 찬가〉를 초연 지휘하고,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며 ‘새들의 노래’를 연주했다. 1973년 이스라엘 음악제에서 마지막 연주 후 그해 9월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