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시 쓰는 첼리스트가 전하는 삶과 가까운 예술
이름으로만 알려져 있던 첼리스트가 마침내 ‘얼굴’을 드러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나 비발디의 첼로 소나타,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 녹음으로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사랑 받은 율리우스 베르거(Julius Berger)의 책이 우리말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은 단순한 음악 에세이가 아니다. 이 책은 인생과 만남, 음악에 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시집이기도 하고 공들여 촬영한 이슬들의 이미지가 담긴 사진집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그의 음악 인생을 담담하고 소박하게 풀어낸 수필집이기도 하다. 첼리스트가 시인, 사진작가, 수필가가 된 것이다. 왜 이 저명한 첼리스트는 활을 잠시 내려놓고 펜과 카메라를 든 것일까.
율리우스 베르거는 유명 레이블의 자켓을 장식하는 스타 연주자는 아니지만 본고장 독일과 유럽에서 깊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가 오래도록 존경을 받는 이유는 언제나 본질을 탐구하는 구도자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유명세나 시장성에 연연하지 않고 첼로의 기원을 탐구하고, 새로운 작품을 발굴하고 특히 현대음악의 작곡을 후원해 온 것이다. 그의 디스코그래피에는 유독 세계 최초 녹음이 많은데, 아마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를 제외하면 베르거만큼 작품을 많이 발굴한 이도 드물 것이라 생각된다.
첼로와 그 연주법, 새로운 작품에 몰두했던 그가 자기 이야기를 풀어낸다. 음악에서 본질을 향했던 것처럼 그는 시와 글, 사진에서도 본질을 말한다. 자신을 어필하고, 포장하여 유혹하는 데 익숙한 스타 마케팅의 세상에서 율리우스 베르거는 그보다 더 나은 가치를 말한다. 그것은 곧 삶 가까이에 있는 예술과 그것이 전해주는 상상력과 영성이다.
스타가 아닌 구도자
1954년 독일 아욱스부르크에서 태어난 첼리스트 율리우스 베르거는 지난 40여년 동안 음악계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바흐 첼로 모음곡 두 번째 녹음(Wergo)이 나온 직후 볼프에버하르트 레빈스키는 율리우스 베르거를 "첼로의 예언자"라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단순히 훌륭한 해석자 역할에 국한되지 않는다. 연주자, 교육자, 연구자이자 이미 '발길이 닿은' 길은 피하려는 개척자요, 음악 철학자로서 율리우스 베르거는 그간 음악 세계를 풍성하게 했다.
율리우스 베르거는 탁월한 스승인 프리츠 키스칼트(뮌헨)와 안토니오 야니그로(잘츠부르크)를 사사했다. 특히 베르거는 이후 미국 신시내티의 자라 넬소바에서 야니그로의 조수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한편 베르거는 전설적인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의 밑에서도 한동안 공부했고 이후 수많은 콘서트에서 함께 연주하면서 각별한 관계를 가졌다.
레너드 번스타인, 올리비에 메시앙, 소피아 구바이둘리나와의 예술적 협업이나 오스트리아의 로켄하우스 페스티벌로 그를 자주 불러들인 기돈 크레머와의 교류는 베르거의 음악 인생에 더할 나위 없는 영감을 주었다.
율리우스 베르거는 세계적인 인지도를 지닌 솔로 첼리스트 및 실내악 연주자로서 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또 교육자로서도 많은 훌륭한 연주자를 양성했다. 그의 제자들 중 다수가 오늘날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등 저명한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거나 음학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율리우스 베르거에게는 역사적 고전이나 동시대 작품 사이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스승이자 친구인 로스트로포비치와 마찬가지로 그는 현재 활동 중인 우리 시대의 작곡가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작품의 탄생을 자극하는 '촉매 역할'을 자처했다. 작품을 위촉하거나 초연 혹은 최초공개연주 등으로 후원한 것은 실로 그의 커다란 공헌이다.
예를 들어 그는 젊은 시절부터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프랑기스 알리자데, 아드리아나 횔스키, 마누엘라 케러, 크시슈토프 메이에르, 빌헬름 킬마이어, 요하네스 X. 샤흐트너, 마르쿠스 슈미트, 조반니 보나토, 서홍준 등의 신작을 선보였다. 한편 2014년 서울국제음악제에서 율리우스 베르거는 그의 아내이자 첼리스트인 성현정과 함께 소피아 구바이둘리나의 두 대의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두 개의 길〉을 성공적으로 세계 초연했고, 이듬해인 2015년에는 독일 본의 베토벤 페스티벌에서 동곡을 유럽 초연하기도 했다.
첼로 문헌의 연구에 있어서도 율리우스 베르거는 중요한 공헌을 남겼다. 특히 루이지 보케리니의 첼로협주곡과 첼로소나타의 사례처럼 잊혔던 명작들을 최초로 녹음하기도 했고, 레오나르도 레오의 첼로 협주곡에 있어서도 선구적인 녹음을 남겼다. 현존 최고最古의 첼로 악보인 도메니코 가브리엘리와 잔바티스타 델리 안토니의 리체르카레들을 발굴하여 역시 최초로 음반화했다. 그는 또한 여러 주요한 첼로 작품의 원전판 에디션의 편저자이기도 하다.
율리우스 베르거는 오랫동안 독일 에켈스하우젠 페스티벌과 이탈리아 아시아고 페스티벌의 총감독을 맡고 있다. 동시에 그는 독일 마르크노이키르헨 국제 기악 콩쿠르의 이사장이기도 하다. 한편 2009년 이래 그는 마인츠 문예 학술 아카데미의 정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삶 가까이에 있는 예술: 공동체 안의 음악
그러나 저자로서 율리우스 베르거는 더없이 소박하고 겸손하다. 음악이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깐 있다 사라지는 그 순간은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답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순간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눠야 한다고 느낀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음악가로서 자신의 전문성을 나타내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그저 동료 인간으로서의 공통점, 즉 공감대를 풀어내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는 아이 시절을, 장애인 누나와의 추억을, 부모님과 그 분들의 죽음을, 그리고 흉허물 없이 예술의 순간을 나눌 수 있었던 친구들을 추억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소박하고 삶과 가까이에 있어서 예술을 잘 모르는 이라도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예술은 본래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어야 하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술에 대한 진입 장벽이 너무 높고,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에 대한 울렁증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역자 나성인은 이 책의 의의를 인상적으로 짚어낸다. 이 책은 다양성과 사심 없는 애호를 기르는 여유로운 문화를 말하고 있다. 이 때의 여유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취향과 선택이 존중 받을 것을 신뢰하는 데서 생겨난다. 바로 성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기다려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만일 이러한 여유가 확산된다면 결과와 상관없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 자체도 하나의 사심 없는 시도다. 첼리스트가 글을 쓰고 시를 쓰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공동체와 함께 나눈다. 순수하고 깨끗한 애호의 감정,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율리우스 베르거의 어투는 진솔하고 담백하여 마치 듬직한 독일 나무 한 그루가 말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본질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깊은 울림을 되어 자연히 그의 첼로 소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나는 독일 빵처럼 건강한 글이었다. 우리 예술도 더 공동체적이 될 때 더 건강하고 깊어지지 않을까.
상상력, 만남, 영성이 이루는 공감각적인 세계
이 책에는 율리우스 베르거가 직접 촬영한 여러 편의 사진 작품도 들어 있다. 작품의 주제는 ‘이슬 방울’이다. 이 이슬 방울의 둥근 모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 천구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곧 깨어져 버릴 아름다운 순간을 상징한다. 그 때문에 이슬 방울은 동시에 음악의 상징이기도 하다. 모든 음악도 울리는 순간에는 존재하다가 곧 흩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율리우스 베르거의 이 책은 시와 글을 읽고 또 사진을 보면서 저마다 음악을 상상하게 되는, 책의 제목과 같이 ‘이슬의 소리를 듣는’ 공감각적인 책이 된다.
시와 글, 사진은 하나의 음악이지만, 이보다 더 큰 삶 안에 있다.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만남의 순간이 있듯이 말이다. 이 책은 갖가지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장애인 누나 무쉬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비롯해 가족과 지인들과의 만남이 이 책에 들어 있다. 한편 피에르 로랑에마르, 로스트로포비치, 기돈 크레머 같은 저명한 음악가 동료들과의 만남도 시와 글에 실려 있다. 바흐와 슈만, 슈베르트, 구바이둘리나 같은 작곡가 및 작품과의 만남도 한 축을 이룬다. 한 사람의 예술가가 이처럼 ‘만남’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저 무대를 자신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것을 소중한 순간의 만남으로 여기기에 그의 글은 소박하지만 깊다.
소중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음악은 침묵에 빠진다. 그것은 음악의 죽음이다. 이처럼 인생에서도 만남의 순간이 가고 나면 죽음이 찾아온다. 이 책은 많은 죽음을 회상하고 또 기념한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율리우스 베르거는 그가 겪은 죽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더 높은 차원의 영성과 섭리를 이야기한다. 그 때문에 다시 그의 글은 소박하지만 깊다.
시심을 지닌 예술가를 그리워하다
율리우스 베르거가 마음을 기울여 쓴 시들을 읽으며 독자들은 삶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깊고 또 진솔한 한 인간의 시심詩心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시심이 점점 희귀해지는 시대, 자신을 돌아보고, 앞날을 내다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자기 일에 몰두하되 복된 순간을 공동체와 함께 나누려는 마음을 가지자고 독려한다. 스타 마케팅의 사회, 불안 마케팅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율리우스 베르거는 소박함과 진솔함의 미덕을 가만히 일러준다.
율리우스 베르거의 글은 그의 첼로 소리를 닮았다. 그의 시와 사진도 따뜻한 온기와 울림을 머금고 있다. 그런데 그의 글이며 음악은 결국 그의 삶을 닮았다. 삶과 글, 삶과 음악이 일치하는 이런 진실함을 우리는 그리워한다.
우리는 모두 잃어버릴 수밖에 없지만, 마음으로나마 가버린 시간을 붙잡고 싶다. 그런데 그것을 실행한 것이 실은 예술이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삶과 얼마나 가까운가. 소박하지만 깊다. 삶과 가까운 예술은 그런 것이다. 이 책이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진지하게 읽힐 수 있는 이유다.
- 끝 -
■ 책 속에서
6쪽
진정한 여유는 넉넉한 형편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형편보다는 신뢰에서 나온다. 나의 선택과 취향이 존중 받을 거라는 신뢰, 결실이 조금 더디게 나타나도, 기다림이 조금 길어져도 괜찮다는 신뢰 말이다. 여기에는 뒤쳐지면 어쩌지 하는 조바심이 없다. 더 많은 사람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도 없다. 다양성과 사심 없는 애호를 틔우는 문화적 토양을 가꾸려면 불안의 잡초를 제거해야 한다. 결과와 상관없이 새로운 만남과 시도를 아낌 없이 독려해야 한다.
11쪽
예술과 삶이 이토록 가깝고도 정답게 그려진 글이 있을까. 비록 소박하지만, 삶과 가까운 예술을 담담하게 말해주는 첼리스트의 시와 글을, 그의 소리 나는 이슬들을 꼭 소개하고 싶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시와 음악, 그리고 '이슬들'과 함께 했던 행복한 동행이었다.
이슬의 소리를 들어라. 귀가 열리면, 독자 여러분의 삶에서도 은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 소리는 불안을 몰아내고 본질을 향하는 여유를 선사해 줄 것이다.
26~27쪽
정신 지체를 지닌 우리 누나에 대해 소피아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어린 시절엔 어땠는지, 가족들과 함께 등산 갔을 때는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등등 그렇게 많은 것을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우리 누나는 아빠 손을 잡고, 남동생은 엄마 손을 잡고…… 부모님한테 그때 얘기를 자주 들었다. 다섯 살 꼬마였던 내가 이렇게 말했단다. – “그럼 나는 또 혼자서 가야 하는 거야?” 소피아가 끼어들었다. “율리우스, 그게 자기 인생의 주제였구나! – 혼자 있다가 나와야 사람이 훌쩍 자라는 법이에요.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혼자 있지를 못하죠. 두려우니까요, 그런데 뭘 두려워하는 줄 아세요? 자기 앞에 마주서는 걸 가장 두려워한답니다!”
32쪽
다시금 나의 들음을 마음 안에 들인다
40쪽
그 꽃이 영원을 건드린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이 하룻밤의 고요는
영원의 빛이 된 것이었다
48쪽
노이슈반슈타인 성에서의 드보르자크 공연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어쩌면 필거슈로펜에서의 내 짧은 여행이 공연 당일 밤, 어떤 사랑의 더없이 아름다운 기록이었던 그 선율에 신비한 힘과 애절함, 고통과 은둔의 음성을 더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54쪽
호엔슈방가우에 있는 우리 집 보리수 뒤편에서 별이 빼곡한 하늘을 바라보는 밤이면 우리네 인간 존재가 지닌 뜻이 무어냐 하는 물음이 가만히 떠오른다. 이론적인 확률로 치면 꽤 많은 행성에도 지성을 갖춘 생명이 있을 법 하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곧 내게 다시 바흐의 솔로 모음곡이나 슈만의 협주곡이나 엘가 협주곡의 에필로그 부분 등등이 떠오른다. 어쩌면 이런 대목들이 막 시작된 하늘의 음악은 아닐까. 내가 혹 하늘에서 보낸 소식을 감지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뜻있는 존재다. 우리에게는 삶과 업 안에서 받은 사명이 있다. 나는 그 사명을 마음에 품는다. 언제나 그럴 것이다.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62~63쪽
이번에 베렌트를 찾아갔더니 그가 커피나 한 잔 하자며 공방 뒤쪽에 마련된 응접실로 나를 청하는 것이었다. 거실 같은 그 공간에는 오래된 가구들이 놓여 있었고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와 첼리스트의 사진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그리고 소파 위에 놀랄 만큼 아름다운 다섯 줄짜리 첼로가 뉘어져 있었다. 그런 것은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순간 바흐 모음곡 6번이 폭발음을 일으키며 뇌리에 떠올랐다. 그때까지 나는 바흐가 직접 남긴 “5현 첼로로”라는 지시를 실현시킨 연주를 들어본 바 없었다. 초조해진 나는 베렌트에게 그 첼로의 내력을 물었다. “어제 들어온 첼로인데, 암스테르담의 어느 가문 소유로 전해져 내려왔다더군. 1700년 제작 얀 피테르 롱바르라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일 내가 계획대로 한 달 전에 왔더라면 이 첼로를 절대로 만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74쪽
하나 하나의 음표는 해석자의 영혼을 본 떠 가진 채 ‘여행할’ 권리를 가진다. 이 교환불가능한 소리의 표식은 유일무이하다. 마치 각각의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걸작의 훌륭한 해석을 그대로 따라 하려는 모든 시도는 거짓말이나 다름 없다. 해석자는 커다란 진실성과 겸손함으로 작곡가의 작품 그 본질을 규명하는데 헌신해야 한다.
82쪽
바로 이 순간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저 멀리서 공연장을 가로지르며 나풀나풀 날아다니다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슈만 협주곡에서 특히 아름다운 중음주법 대목에서는 아예 첼로 위에 앉는 것이었다. 얼마나 곱고 다정한 순간이었는지,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지만 동시에 집중력을 잃으면 어쩌지 걱정도 되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첼로 위에서 음악의 진동을 온 몸으로 느꼈을 그 하얀 나비는 악장이 끝날 때가 되어서야 다시 날아올라 홀의 넓게 열린 공간을 향했다. 더 높이, 더 멀리, 하이얀 점이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날아가 버렸다. 협주곡이 끝나고 환호를 보내던 그 날의 청중들은 연주의 한 가운데서 나비와 내가 가진 은밀한 만남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105쪽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호엔슈방가우에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딜링엔에서의 최후의 시간. 이 때의 무쉬는 이미 지혜로운 여인이 되어 있었다. 아픔과 고통 자체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그에게 더 중요했다. 그것은 무쉬가 우리 주 하느님을 대하는 자세이기도 했다. 무쉬는 십자가를 받아 들고, 품에 안았다. 임종의 날 무쉬는 나와 현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뭐할까? 같이 카페에 갈까?” 밖으로 예배당이 보이는 탁 트인 카페에 앉았지만, 무쉬는 코코아를 마시지 못했다. 그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뭘 사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다시 방으로 올라온 무쉬는 지갑을 제자리에 놓으려고 애썼고, 나는 임종 두 시간 전에도 한 번 더 누나의 얼굴을 보았다.
127쪽
“내가 천국에 가면 말이야”, 슬라바는 한 삽심오 년쯤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토벤에게 첼로 협주곡 한 곡만 써 주실 수 없느냐고 여쭤볼 것 같아.” 우리가 아는 슬라바라면 그는 베토벤에게서 헌정 받은 이 협주곡을 그간 천국에서 백 번도 넘게 연주했을 거고, 심지어 파우 카살스도 자기 레퍼토리에 이 곡을 추가했을지 모르며 크론베르크 아카데미를 이끄는 라이문트 트렝클러는 이 중요한 작품을 어떻게 크론베르크로 가져와 초연할지를 생각하느라 온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겠지요. 물론 베토벤은 사는 날 동안 첼로 협주곡을 쓴 적이 없고, 슬라바의 인생은 20세기에 펼쳐졌으니 이런 이야기는 모두 유쾌한 상상입니다.
169쪽
나이가 들면 내다볼 수 있게 된다. 언젠가 우리가 자유롭게 넘나들게 될 저 경계 너머의 영역을 말이다. 나이가 들면 되돌아 볼 수 있게 된다. 산이 지닌 비밀이 계시된다고 할까. 빛이 거하는 산을 오르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우리는 여정에서 우리는 보살피시는 섭리를 경험한다. 우리의 발걸음은 과거를 반추하거나 앞날을 내다보는 시선에 따라 가야 할 바를 찾는다. 만물에 깃든 하나됨이 점점 커진다.
■ 지은이
율리우스 베르거 Julius Berger
세계적인 첼리스트 율리우스 베르거는 독일 아욱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프리츠 키스칼트(뮌헨), 안토니오 야니그로(잘츠부르크)를 사사한 그는 로스트로포비치와도 각별한 관계를 가지며 구도자적인 첼리스트로 자리매김했다. 또 레너드 번스타인, 올리비에 메시앙,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기돈 크레머와의 교류는 그의 음악 세계를 풍성하게 해 주었다. "첼로의 예언자"라는 찬사에 걸맞게 율리우스 베르거는 이미 '발길이 닿은' 길은 피하는 개척자요, 음악 철학자로서 연주와 문헌 연구, 저술과 교육을 병행하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현재 이탈리아 아시아고 페스티벌, 독일의 에켈스하우젠 페스티벌의 총감독을 맡고 있으며 마인츠 문예 학술 아카데미의 정회원이기도 하다.
율리우스 베르거에게는 역사적 고전이나 동시대 작품 사이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스승이자 친구인 로스트로포비치와 마찬가지로 그는 현재 활동 중인 우리 시대의 작곡가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작품의 탄생을 자극하는 '촉매 역할'을 자처했다. 작품을 위촉하거나 초연 혹은 최초공개연주 등으로 후원한 것은 실로 그의 커다란 공헌이다. 베르거는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프랑기스 알리자데, 아리아나 횔스키, 마누엘라 케러, 크시슈토프 마이어, 빌헬름 킬마이어, 요하네스 X. 샤흐트너, 마르쿠스 슈미트, 조반니 보나토, 서홍준 등의 신작을 선보였다.
첼로 문헌의 연구에 있어서도 율리우스 베르거는 중요한 공헌을 남겼다. 특히 레오나르도 레오의 첼로 협주곡이나 루이지 보케리니의 첼로 협주곡과 첼로 소나타의 사례처럼 잊혔던 명작들을 녹음하기도 했고, 첼로의 근원을 탐구하며 도메니코 가브리엘리와 잔바티스타 델리 안토니의 리체르카레들을 발굴하여 최초로 음반화했다.
고향 마을, 알고이 지방의 산골을 찾을 때마다 그는 열정적인 사진 작가요 시인으로 변한다. 2019년 그는 시와 산문, 사진을 한데 엮은 『이슬의 소리를 들어라(원제: 이슬 방울)』를 파트모스 출판 그룹의 에쉬바흐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 옮긴이
나성인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아욱스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했다. 독일 시를 전공한 뒤 예술가곡 분야의 코치 및 공연기획자로 활동했다. 인문학과 클래식의 만남에 주목하여 강의와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베토벤 아홉 개의 교향곡』, 『하이네. 슈만. 시인의 사랑』, 『슈베르트 세 개의 연가곡』, 『베토벤 현악 사중주』 등이 있으며 현재 부정기 예술 무크지 『풍월한담』의 편집을 맡고 있다.
도서명 | 이슬의 소리를 들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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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율리우스 베르거 |
출판사 | 나성인 |
크기 | 122x186mm |
쪽수 | 200쪽 |
제품구성 | 낱권 |
출간일 | 2020년 11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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