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의 쓸모

소멸하는 시대의 마지막 품위,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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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멸하는 시대의 마지막 품위,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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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멸하는 시대의 마지막 품위, 교양

     

    나를 지켜낸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삶에 밴 교양이었다.”

    AI가 사고를 대체하고, 급변하는 기술이 인간을 끊임없이 몰아붙이는 시대에 교양은 더 이상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 어떤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는가가 우리 시대의 핵심 화두다. 장석주 시인의 교양의 쓸모는 바로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그는 교양이 생존의 방식이며, 지식보다 오래가는 힘이라고 말한다. 밥을 짓고, 걷고, 일하고, 늙어가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인간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품격과 태도의 여러 가지 모습을 포착한다.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가 놓치고 있는 것은 깊이에 대한 감각이다. 교양의 쓸모는 그 감각을 잃어버린다면 인간은 결국 기술의 부속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경고한다.

     

    교양은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

     

    교양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교양을 본성이나 피의 기질과는 다른 올바름이며, 품성의 고결함이라고 말한다. 교양은 삶이 주는 경험과 깨달음에서 직조되는 것이고, 몸에 밴 앎이자 덕의 실천이며, 그 실천에서 배어나는 기품이다. 핵심은 그것이 삶의 흐름 속에 자연스레 배어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저자는 들길을 걷고, 밥을 지어 먹고, 나이를 겪어내는 과정 속에서 마주한 작고 느린 풍경들, 카페의 낮빛, 도서관의 서늘한 기척처럼 자신의 몸으로 겪고 지나온 것들을 바탕으로 교양을 말하고자 했다. 몸으로 겪은 것이란 어쩌면 별것 없는 일상일 뿐이다. 그러나 삶의 경유지들에서 부딪히고, 생각하고, 깊이 들어가 보아야 비로소 마음에 남는다. 그래서 교양은 결국 용기를 전제로 한다.

     

    작가는 묻는다. “우리를 사람답게 버티게 하는 힘은 정말 사라진 것일까?” 그는 교양이라는 오래된 단어의 먼지를 털어낸다. 교양은 지식의 높이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시선이다. 교양의 쓸모는 바로 이 질문을 따라간다.

     

    일상의 결을 읽어내는 예민한 감각

     

    일상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대신, 그 결을 읽어내는 일. 장석주는 바로 그것을 교양의 시작으로 본다. 그에게 교양은 거창한 학문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감각이며 마음이 던지는 질문이고, 삶이 남겨놓은 무늬에서 비롯된다. 노동과 책임의 무게, 나이 듦의 체감, 타인의 고통을 흘려보내지 않는 민감함 등 작가가 천천히 꺼내놓은 장면들은 독자에게도 묻는다. “지금 내가 지켜야 할 품격은 무엇인가?”

     

    교양의 쓸모는 속도전을 잠시 멈추라고 말한다. 밖으로만 향하는 시선을 안으로 돌리라고 권한다. 그래야 내 하루의 결을 살피고, 내 존재에게 말을 거는 태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의를 기울이고, 몸의 감각을 세심하게 깨우라고도 한다. 그렇게 느껴야만 비로소 깊게 호흡할 수 있고, 일상 속에서 마음에 남는 풍경을 건져 올릴 수 있다. 교양은 낮은 곳에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감각에서 시작된다고 그는 말한다.

     

    밥과 노동과 꿈

     

    속도의 시대, 파편화된 공동체, 낮아진 정신의 지붕 아래서 작가는 우리가 마지막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인간적 품위로서의 교양을 이야기한다. 그의 경고는 단호하다. “교양의 소멸은 곧 인간다운 주체의 소멸이다.”

     

    교양의 쓸모는 밥과 노동, 꿈의 이야기에 오래 머문다. 밥은 생존의 행위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이며, 노동은 정신을 붙드는 힘, 꿈은 지치지 않고 내일을 바라보게 하는 불씨다. 밥을 대하는 태도가 흐트러지면 노동이 건실해지기 어렵고, 노동이 힘을 잃으면 정신도 약해진다. 약해진 정신으로는 눈앞의 것 이상을 바라보기 어렵다.

     

    그래서 작가는 청년 시절의 가난과 흔들림, 하루의 무게를 숨기지 않는다. 그 땀 어린 시간을 지나며 깨달은 것은, 교양이란 삶의 무게를 정직하게 견뎌낸 사람에게서 배어나오는 빛이라는 사실이다. 평범한 밥과 꿈의 이야기 속에서 오히려 인간다운 품격의 토대는 한층 선명해진다.

     

    어른이 사라진 시대, 사람 사이를 생각하다

     

    교양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힘이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를 조율하는 예술이다.

    상처받기 쉽고, 분노하기 쉽고, 판단이 앞서는 세태를 작가는 어른의 부재로 설명한다. 참된 어른은 나이로 결정되지 않는다. 자기 삶의 책임을 다하고,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려 깊은 사람이 바로 어른이다. “어른이란 타인을 쉽게 상처 내지 않는 태도로 완성된다.”

     

    그러니 교양이란 말을 아끼고, 귀를 기울이며, 다정함을 잃지 않으려는 작은 의지다. 관계가 쉽게 마모되는 시대에 교양은 보이지 않는 완충재처럼 서로를 상하게 하지 않고, 조금씩 더 나은 쪽으로 이끄는 품위로 작용한다. 또한 얼핏 예술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같지만 때로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처럼 편견을 숨기고 있기도 한데 (나비 부인과 나비 씨), 그런 왜곡된 시각과 모순을 바로잡는 일도 결국 예술 자신의 몫이다.

     

    책과 문장들이 삶으로 배어드는 과정

     

    책의 중반부에서 펼쳐지는 독서와 사유의 장면들은 문학과 철학의 문장들이 어떻게 한 사람의 내면을 바꾸는지를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읽는다는 것은 곧 자신을 다시 쓰는 일이다. 그래서 읽은 문장들은 책 속 활자에 머물지 않고, 책 밖의 체험들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정신과 감각이 어우러진다. 헤세의 문장은 지나온 계절과 겹쳐 읽히고, 카뮈의 사유는 제주에서 만난 바람처럼 마음의 방향을 바꾼다. 데릭 월컷의 문장은 한여름 빛 아래서 더욱 선명해진다. 그렇게 독서와 삶이 겹쳐질 때, 삶을 읽어내는 감각 깊어진다. 머리로만 알던 것이 몸과 마음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가 머물렀던 파주·안성·제주·강원 산골과 절집의 시간이 책 속 문장들과 포개지며 새로운 울림을 만든다. ‘문장은 저자를 닮는다는 말처럼, 사람은 자신이 읽어온 문장들에 의해 천천히 빚어진다. 이 책에는 저자가 평생 읽어온 문장들과 그 시간의 결이 고요히 배어 있다.

     

    나이 듦과 자화상, 삶을 고요히 바라보는 기술

     

    우리는 나이 듦을 감추려 하지만, 작가는 거울 앞에 천천히 선다. 그에게 나이는 결핍의 표식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의 질감이다. 자화상은 세상의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작업이다. 책 속에서 그는 자신의 취향과 습관, 두려움과 기쁨을 조용히 펼쳐 보인다. 그 과정은 독자에게도 묻는다. “당신을 만든 풍경과 기억은 무엇인가?”

     

    교양은 외부에서 끌어오는 장식이 아니라, 삶을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 자기 삶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AI 시대, 인간을 지탱하는 마지막 힘

     

    우리는 새로운 기술이 축적된 삶의 지혜를 단번에 뛰어넘는 듯 보이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AI는 체험을 축약하고, 숙성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과정과 과도기, 중간 단계에서 생겨나는 다채로운 경험들은 생략되고, 결과만이 빠르게 산출된다.

     

    경험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장석주 시인의 교양의 쓸모는 하나의 여정으로서의 교양을 강조한다. 들길을 걷는 시간, 책을 읽고 사유하던 순간, 노동과 관계 속에서 배운 마음의 자세들을 통해 그는 교양을 창의성과 자유, 그리고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태도라고 정의한다.

    들길에서 시작해 교양의 바다로 나아가는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속도가 아니라, 내면의 밀도와 천천히 쌓여가는 품격임을 조용히 일깨운다.

     

    * 차례

     

    서문

     

    1 교양의 쓸모

    들길

    정원 예찬

    밥과 꿈

    어른의 품격

    나이 유감

    자화상

    나는 여전히 뭔가를 찾고 있어요

    카르페 디엠

    노스탤지어 은하계

    독서는 교양의 기초 토대다

    그건 교양이 아니에요

    교양의 쓸모

    교양의 소멸

     

    2 인생의 의미

    웃는 사자가 온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벚꽃 필 때 죽음을 생각하라

    전직, 이직, 휴직

    세상에 나가면 일곱 번을 태어나라

    쇼펜하우어 열풍

    해남엔 못 간다

    , 바슐라르, 촛불

    음악의 필요

    한국문학을 크게 칭찬함

    장소와 장소성

     

    3 계절의 감각

    여름의 의무는 행복

    지중해에서 보낸 여름 한 철

    장마와 청포도

    템플스테이를 하며 보낸 여름

    대학 기숙사에 머물며 글쓰기

    가을의 기척

    죽고 싶을 만큼 살아봐야겠다

    가을과 고양이

    겨울의 들머리에서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에서

    봄날은 무슨 꽃으로 내 가슴을 문지르는가?

    봄은 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4 생활의 사상

    살아라, 기뻐하라, 감사하라

    밤의 고독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노래하라

    강연 소동

    K리그를 보러 가자!

    팬데믹과 낙인찍기

    정치가 국민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을까

    우정: 두 몸에 깃든 한 영혼

    가족: 가끔은 내다 버리고 싶은 것

    폭력: 우리 곁을 떠도는 유령

    희망: 새로운 것을 내놓는 산파

    피로: 얼굴 없는 유령

    신념: 우리 정체성의 일부

    벌새: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스승

     

    * 책 속에서

     

    서문

    감히 천학비재의 얕은 앎과 굼뜬 솜씨로 교양의 쓸모란 책을 쓰는 일은 지난했다. 교양은 관념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결로 드러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까닭에 교양에 대해 쓰면서 내 삶과 몸으로 겪은 것을 바탕으로 쓰여야 옳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 실린 것들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나의 생생한 몸을 거쳐 풀려나온 이야기다. 관념으로서의 교양을 기대한 독자라면 조금 당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실감으로서의 교양이 마음에 더 깊이 스며들 수 있을 거란 기대도 갖는다. (10)

     

    정원 예찬

    삶이 삭막하고 불행해질 때 가장 먼저 땅과 식물을 떠올린다. 땅은 중력이 작용하는 물질의 세계이고 촉각의 세계에 속한다. 정원에서의 일들은 흔히 흙을 만지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흙과 식물을 만지는 노동은 우리 영혼을 흙과 더 가까이 접근해서 결속시키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삶의 메마름 속에서 말라버린 영혼이 깨어난다. (21)

     

    밤과 꿈

    사람은 생의 보람을 만드는 일을 할 권리가 있다. 일은 사회적 고립을 떨치고 사회 공동체와 이어지는 방식이고, 생을 의미로 빚는 유력한 수단이다. 일은 기쁨과 보람을 주는 존재 증명이자 자아실현의 방법이다. 그럴 때 비로소 산다는 것은 나만의 은신처에서 박차고 나와 세계로 나아가는 항해가 될 테다. 날마다 도시 외곽에서 출근 전쟁을 치르며 도심의 직장으로 나가는 이들은 고단한 항해자들이다. (27~28)

     

    어른의 품격

    어른이란 곧 일하는 사람이다. 즉 자기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고, 가족 부양의 책임도 기꺼이 지는 사람이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어른의 자격이 없다. 어른은 제 삶의 무게를 받아들이고 견디는 사람이고, 필요한 교양과 지식을 쌓으며, 어른의 일을 감당한다. (34)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후대에게 삶의 푯대가 될 수 있는 어른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36)

     

    나는 여전히 뭔가를 찾고 있어요

    지구 생명체 중 의미를 찾는 존재는 사람이 유일할 테다. 그 유일함으로 사람은 동물 일반과 분별된다. 나는 의미를 찾는다. 고로 존재한다. 이 명제는 참이다. (51)

     

    노스텔지어 은하계

    시골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쏟았다. 내 안에 무슨 서러움이 그토록 많았을까? 시골의 내와 강, 시골 학교 운동장, 국기게양대에서 바람에 나부끼던 태극기, 들길과 초목들, 둔덕, 외삼촌들이 꿩을 몰던 흰 눈 덮인 들이 눈앞에 삼삼하게 떠올랐다. 나는 밀려오는 슬픔에 자면서도 울고 찬밥을 먹으면서도 끄억끄억 울었다. 내 안의 결핍감 혹은 상실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지는 못했다. (67)

     

    노스탤지어라는 생경한 외래어를 접한 건 열대여섯 살 때다. 어떤 시에서 발견한 단어다. 노스탤지어는 정서적 유대감이 쌓인 과거 시공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그것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내 최초의 질병은 노스탤지어였다. 나는 그게 병인지도 모른 채 앓았는데, 복잡하고 미묘한 슬픔과 매혹을 지닌 그것은 질병과 정념 사이에 걸쳐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 얕은 잠, 무기력을 동반한 그것은 고향을 향한 애착과 그리움이 만드는 달콤 씁쓸하고 숭고한 감정이다. 대개는 낯선 현실로 밀려온 데서 밀려드는 슬픔과 멜랑콜리, 잃어버린 시간을 향한 낭만적 회고에 빠지는 사람들이 노스탤지어를 앓는 것이다. (68)

     

    그건 교양이 아니에요

    딱 집어서 인식하지 못했지만, 내가 갈망한 것은 바로 교양이었다. 아아, 교양! 그렇다고 교양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양은 좋은 어른이 보여주는 기품이자 품격이라는 정도에 내 인식은 머물러 있었다. 교양을 향한 동경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에 심취하고 고전음악을 듣는 가운데 빚어진 무의식의 욕구였을 테다. 책을 읽으며 고전음악을 들으며 상상한 아름다운 세계와 비루한 현실 사이의 괴리를 온몸으로 절감했다. 눈뜨면 만나는 악다구니와 드잡이가 일상인 남루한 현실 너머에 내가 꿈꾸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욕구와 교양 욕구는 하나다. 그 두 욕구가 내면에서 쑥쑥 커지면서 나를 삼켰다. (78)

     

    교양의 소멸

    교양은 쓸모없음을 쓸모로 하는 희귀한 사례일 테다. 인생의 가치를 쓸모의 잣대로만 측정할 수가 없듯이 교양은 쓸모의 논리로만 따질 수가 없다. 교양의 필요를 부정하는 것은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부정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89~90)

     

    문학이라는 은신처

    나 역시 살면서 여러 이유로 전직, 이직, 휴직을 겪었다.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사는 게 마치 갑옷을 두른 듯 답답했다. 사는 게 막막하고 고달프면 자꾸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그곳이 사막이건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건 상관없다고 속삭였다. 그 도피 욕구는 자주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민도 좋고, 유학도 좋았겠지만 내 처지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112)

     

    내 젊은 날은 그 도피의 욕망으로 얼룩져 있다. 내가 찾은 가장 먼 여행지,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은신처는 문학이었다. 문학이라는 은신처에서 나는 비로소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113)

     

    , 바슐라르, 촛불

    인간의 성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스승이 있다. 시인에겐 만물이 다 스승이다. 스승은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자아를 밖으로 끄집어내고 단련시키는 자다. 스승이란 내 안의 꺼진 램프에 불씨를 붙여주는 자다. 램프의 주홍색 불꽃이 영감과 사색을 길러주고 고양시키면 나에게는 작은 불꽃을 큰 화염으로 키울 의무가 지워진다. 내 스승은 시냇물, 촛불, 망각, 무지몽매함, 청동 문고리, 한옥의 처마, 벼랑, 바다, 감기, 무한 고독, 램프의 빛, 나무, …… 등등이다. 스물세 살 때 시립도서관 참고열람실에서 여러 작가와 철학자의 책을 섭렵하고 줄곧 혼자 시를 썼다. 그러다가 평론을 썼다. 문학평론에 대한 영감을 준 사람은 시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다. (130~131)

     

    여름의 의무는 행복

    젊은 날을 분노와 적대감으로 좌충우돌하며 흘려보낸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와 철학과 음악에서 한 줌의 기쁨과 위안을 구했지만 나는 한심한 영혼이 되고야 말았다. 세계가 돌연 낯설어지는 여름 저녁, 나는 생산하는 자들에 기생하며 고작 책 몇 권이나 읽었다. 평생 하염없는 짓이나 하며 살았다. 수족을 놀리는 사람으로 살거나 근면한 농사꾼, 아니면 가구를 만드는 장인이 되거나 봉제공장에서 바늘귀에 실을 꿰고 옷에 단추를 다는 일에 정성을 다하며 살았어야 마땅하다. 출근하는 딸의 구두라도 정성껏 닦아놓아도 좋았을 테다. 그러지 못한 것은 내 과오일 따름이다. (156~157)

     

    밤의 고독

    태고의 무지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 무지와 앎은 대립하지 않는다. 무지는 상식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앎! 온갖 사유를 머금고 우리 안에 머무는 무지는 수행자의 화두이며 수행의 한 방편이다. (206)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노래하라

    나는 대장간을 짓지도, 쇠를 달구고 망치질을 한 적도 없다. 내 일이란 책상에 엎드려 글을 쓴 게 전부다. 그 일은 보이지 않고 그 결과가 구체적 실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 때문에 나는 책상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그 일에 바친 모든 시간이 거짓과 무의미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낳은 괴로움이다. 글쓰기의 공허함. 내가 하는 일이 공동체에 아무 소용도 없는 헛짓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내 존재가 가치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230~231)

     

    가족: 가끔은 내다 버리고 싶은 것

    사실을 말하자면 가족 내부는 말이 많고 탈이 많다. 가족 간 애틋한 사랑의 발원지이자 개별자의 자유를 옥죄는 멍에다. 가족 간에 상처를 주고 트라우마를 남기는 일은 흔하다. 애증을 품고 가족 내부에서 이탈해서도 가족을 향한 사랑과 정을 끊지 못한 채 서로를 그리워하는 게 인간이다. 가족은 우리가 누린 안녕과 보람과 기쁨들의 요람이고, 그 내부에서 쌓은 추억들은 우리 감정의 중요한 재화라고 할 수 있다. (261~262)

     

    벌새: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스승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친 현재의 시공 속의 일에만 매몰될 때 뜻밖에도 우리는 많은 걸 놓친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현재를 넘어 시선을 더 멀리까지 보내야 한다. 누군가는 삶이 짧고 비루하고 잔혹하다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삶이란 기적 속에서는 고통조차 빛나는 까닭에 어느 찰나 불행마저 찬란하다고 할 것이다. (286)

     

    * 저자 소개

    장석주

    집필 노동자. 출판사를 경영하고, 글쓰기를 가르쳤다. 평생 읽고 쓰는 보람으로 책을 쓰며 살아왔다. 지금까지 시집 여럿과 이상과 모던뽀이들,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은유의 힘, 어느 날 니체가 내 삶을 흔들었다, 에밀 시오랑을 읽는 오후, 노자의 마음공부등을 냈다. 지금은 파주에서 고양이 당주헤세’, 그리고 아내와 산다.

     

    도서명 교양의 쓸모
    저자 장석주
    출판사 풍월당
    크기 135*205
    쪽수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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